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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剛山도 息後景 - 풀잎처럼 눕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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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게 아니다

서까래 2010. 4. 6. 21:44

 

그런 게 아니다

전 유엔 사무총장 닥 함마슐드는 이것을 아름답게 표현했습니다."우리가 위격적 신성을 믿지 않게 되는 날 하느님이 죽지는 않는다. 그러나 이성을 뛰어넘는 데서부터 나날이 새로운 경이의 광채가 끊임없이 우리의 삶을 비추지 않게 되는 날 우리는 죽는다." 낱말 하나로 다툴 것은 없습니다. "하느님"이란 한 낱말이고 한 개념일 뿐이죠. 현실을 두고 다투는 일은 없습니다. 견해를, 개념을, 판단을 두고 다툴 뿐이죠. 개념들을 버리십시오. 견해·편견·판단들을 버리십시오. 그러면 현실을 볼 것입니다. "Quia de deo scire non possumus quid sit, sed quid non sit, non possumus considerare de deo, quomodo sit sed quomodo non sit." 이것은 토마스 아퀴나스 성인이 [신학 대전] 전체를 소개하는 글입니다. "우리는 하느님이 무엇인지를 알 수 없고 하느님이 무엇이 아닌지를 알 수 있으므로, 하느님이 어떤 분인지를 고찰할 수 없고 하느님이 어떤 분인지를 고찰할 수 있다."보에시우스의 [삼위일체론]에 대한 토마스의 주해도 이미 언급했죠.거기서 토마스는 하느님 인식의 최고 단계는 하느님을 "알려지지 않는 분"(tamquam ignotum)으로 아는 것이라고 했죠. 또, [하느님의 능력에 관한 쟁점 문제]에서도 "우리는 하느님을 모른다는 것을 아는 것,이것이 하느님에 대한 인간 인식에서 궁극적인 것이다"라고 말합니다. 이 어른으로 말하면 신학자들의 군주로 여겨진 분이죠.신비가였고 오늘날에는 성인으로 공식 선포되어 있는 분이죠. 우리는 퍽 훌륭한 기반 위에 서 있는 겁니다. 인도에는 이에 해당하는 산스크리트어 격언이 있죠. "네티, 네티". "그런 게 아니다. 그런 게 아니다"라는 뜻이죠. 토마스 자신의 방법은 "via negativa", 즉 "부정의 길"이라고 일컫죠. C.S.루이스는 아내가 죽어 가는 동안 [비탄의 관찰]이라는 일기를 썼습니다.그는 매우 사랑하는 한 미국 여인과 결혼했습니다."하느님께서 이십대 때 내게 거부하셨던 것을 육십대 때 내게 주셨다네" 하고 그는 친구에게 말했습니다.결혼하자마자 그녀는 암으로 고통스럽게 죽었습니다. 루이스는 온 신앙이 마치 아이들의 장난감 집처럼 허물어졌다고 말했습니다.그는 대단한 그리스도교 호교론자였는데, 불행이 가정을 강타하자 자문했습니다. "하느님은 자애로운 아버지냐, 아니면 위대한 생체해부자냐?" 두 가지 다 아주 훌륭한 증거가 있죠! 우리 어머니가 암에 걸렸을 때 누이가 나에게 이렇게 묻던 것이 기억납니다. "토니, 왜 하느님은 어머니에게 이런 일이 생기도록 허락하셨을까?""얘, 지난 해 중국에서 가뭄 때문에 백만의 사람들이 굶어죽었는데, 넌 의문을 제기한 일이 없어." 종종 우리에게 일어날 수 있는 최선의 일은 재앙의 충격으로 우리가 현실에 눈뜨게 되는 것입니다. 그때 우리는 루이스가 그랬던 것처럼 신앙에 도달하는 것입니다. 전에는 사람이 죽음에서 살아남 는다는 것을 의심한 적이 없는데 아내가 죽자 확신이 없어졌다고 루이스는 말했습니다. 왜? 그에게는 그녀가 살아 있는 것이 그토록 중요했기 때문입니다. 아시다시피 루이스는 비교와 유추의 대가죠. 그는 말합니다. "그것은 밧줄과 같다. '이게 일백이십 파운드 무게를 지탱할까요?' '그럼요.' '좋아요, 우린 이 밧줄로 당신의 가장 친한 친구를 내리려고 해요.' '잠깐, 내가 그 로프를 다시 시험해 보겠소' 이제는 확신이 없는 것이다." 루이스는 또한 그의 일기에서 우리는 하느님에 대해 아무것도 알 수 없다고, 심지어 하느님에 대한 우리의 의문들이란 어리석다고 했습니다. 왜? 마치 태생 소경이 "녹색은 뜨겁내 차냐?"고 묻는 것과 같으니까. Neti, Neti. 그런게 아냐. "기냐 짧냐?" 그런 게 아냐. 그런 게 아니라니까. 그 소경에게는 색깔에 대한 관념도 직관도 경험도 없고 거기 해당하는 말도 개념도 없습니다. 그에게는 유비를 통해 이야기할 수 있을 뿐입니다. 뭐라고 묻든 "그런 게 아니다"라고 말할 수 있을 따름입니다. 루이스는 어디선가, 그것은 노랑색 속에 몇 분(分)이 있느냐고 묻는 것과 같다고 말합니다. 모두들 그 질문을 매우 진지하게 받아들여 논쟁을 벌일 수도 있겠죠.한 사람은 "노랑색 안에 당근이 스물다섯 개 있을 거야" 하고, 다른 사람은 "아니야, 토마토 일흔 개야" 하고. 그러다가 어처구니없는 싸움이 벌어지는 거죠. 그런 게 아냐, 그런 게 아니라니까! 이런 것이 우리가 모른다는 것을 아는 것이 하느님에 대한 우리 인간 인식에 있어서 궁극적이라는 것입니다.우리의 큰 비극은 우리가 너무 많이 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안다고 '생각'하는 데, 그게 우리의 비극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발견하지 못합니다. 실제로 토마스 아퀴나스는 - 그는 신학자이자 또한 위대한 철학자죠 - 거듭 말합니다. "인간 정신의 온갖 노력으로도 단 한 마리 파리의 본질도 다 알아내지는 못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