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정한 여행의 시작

기쁨은 사물 안에 있지 않다. 그것은 우리 안에 있다!

金剛山도 息後景 - 풀잎처럼 눕자

카톡카톡/2015 보낸 카톡

150815/아! 안중근 의사...

서까래 2016. 4. 8. 11:30

! 안중근 의사...

 

안중근 의사님의 영상부터 보고가자.

***한국인이 알아야 할 영웅 이야기 #1 안중근 .

https://www.youtube.com/watch?v=lbcLi1qC1K8&feature=player_detailpage

 

19091026일 오전 9시경, 조선 식민지배의 원흉인 일본 정치가 이토 히로부미가 기차를 타고 중국 하얼빈역에 도착했습니다. 이토가 일본인 환영단 앞에 도착하는 순간, 회색 양복에 모자를 쓴 한국인 청년이 그의 앞을 가로 막았습니다.

 

바로 대한의군 참모중장 안중근 의사였습니다. 안 의사는 리볼버권총으로 이토의 가슴과 복부를 향해 세 번 방아쇠를 당겼습니다. 안색이 창백해진 이토는 급히 열차 안으로 후송됐고 30분 만에 사망하고 말았습니다. 즉시 러시아 헌병이 와서 안중근 의사를 체포할 때 그는 러시아말로 "코레아 우라(대한 만세)"를 세 번 외쳤다고 합니다.

 

이후 안중근 의사는 하얼빈의 일본영사관을 거쳐 중국 대련시 뤼순에 있는 일본 감옥에 수감되었는데요. 여기서 191027일부터 14일에 이르기까지 6회에 걸쳐 재판을 받았고, 결국 214일 공판에서 사형을 선고 받았습니다.

 

안 의사는 법정에서 이토 히로부미는 한국의 독립주권을 침탈한 원흉이며 동양 평화의 교란자이므로 개인자격이 아닌 대한의군 사령관으로서 처형하였다.”는 말을 남기고 담담하게 사형선고를 받았다고 합니다.

 

사형 선고를 받자 안 의사의 어머니 조마리아 여사는 의사에게 다음과 같은 편지를 보냈습니다. 가히 그 어머니의 그 아들이라고 할 정도로 대단한 기개를 지닌 글이라 할 수 있습니다.

 

너의 죽음은 너 한 사람 것이 아니라 조선인 전체의 공분을 짊어지고 있는 것이다. 네가 항소를 한다면 그것은 일제에 목숨을 구걸하는 짓이다. 네가 나라를 위해 이에 이른즉 딴 마음 먹지 말고 죽으라. 옳은 일을 하고 받은 형이니 비겁하게 삶을 구하지 말고, 대의에 죽는 것이 어미에 대한 효도이다. 아마도 이 편지가 이 어미가 너에게 쓰는 마지막 편지가 될 것이다. 여기에 너의 수의를 지어 보내니 이 옷을 입고 가거라. 어미는 현세에서 너와 재회하기를 기대치 않으니, 다음 세상에는 반드시 선량한 천부의 아들이 되어 이 세상에 나오너라.”

 

어머니의 말에 따라 안중근 의사는 이후 공소도 포기한 채, 뤼순 감옥에서 죽음을 기다리며 <안응칠역사><동양평화론>라는 책을 쓰기 시작했습니다.

 

응칠은 안 의사가 어렸을 때 불렸던 이름으로 <안응칠 역사>는 자서전이고, <동양평화론>은 자신의 거사 이유를 밝힌 책이에요. 특히 안 의사는 이 <동양평화론>에서 아시아 평화를 위한 상설위원회를 만들어 분쟁을 방지하고, 각 국이 일정한 재정을 제공해 개발은행을 설치하여 어려운 나라를 위한 공동개발 자금으로 쓰게 하자는 주장을 펴고 있는데요. 무려 백 년 전에 동양의 평화를 두고 이러한 구상을 했다니 정말 놀라울 뿐이죠.

 

1910326, 안중근 의사는 뤼순 감옥에서 순국했습니다. 그의 나이 불과 서른 한 살이었습니다. 의사는 순국 직전 동포들에게 다음과 같은 유언을 남겼습니다.

 

동포에게 고함. 내가 한국독립을 회복하고 동양평화를 유지하기 위하여 삼 년 동안을 해외에서 풍찬노숙 하다가 마침내 그 목적을 도달치 못하고 이곳에서 죽노니 우리들 2천만 형제자매는 스스로 분발하여 학문을 힘쓰고 실업을 진흥하며, 나의 끼친 뜻을 이어 자유 독립을 회복하면 죽는 여한이 없겠노라

 

최근 한 언론에서 밝혀진 사실인데요. 안중근 의사가 이토를 저격했을 때 수행원 겸 통역사로 있다가 총상을 입은 일본인 다나카 세이지로가 자신이 만난 사람 중에 가장 훌륭한 사람은 안중근이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다나카는 1984년에 펴낸 회고록 <한국 내 마음의 고향>에서 이제까지 만난 세계의 여러 사람 중 일본인을 포함해 누가 가장 훌륭하다고 생각하느냐는 질문에 일언지하에 그것은 안중근이다’”라고 말했다는 것이죠.

 

그는 또 거사 당시 안 의사의 모습에 대해 그때의 안중근의 늠름한 모습과 유연한 언행, 달려든 헌병이나 경찰에게 총알이 아직 한 알 있음을 주의시키는 태도 등은 그의 인격의 높이를 그대로 나타내고 있었으며, 이제까지 본 것 중에 최고였다고 회고하고 있어요. 자국의 정치인에게 총격을 가하고 자신에게도 상처를 입힌 사람을 이렇게 칭찬할 수 있다니, 놀랍지 않나요?

 

이처럼 민족의 기개를 높이고 애국심과 평화사상 등에서 큰 가르침을 주고 있는 안중근 의사. 오늘날까지 그의 높은 뜻과 정신을 기억하기 위해 안중근 의사를 다룬 기념관이나 예술작품도 꾸준히 나오고 있습니다.

 

특히 지난 1월 중국 하얼빈시와 하얼빈시 철도국에서 하얼빈역 귀빈실에 안중근의사 기념관을 개관한 사실이 주목할 만한데요. 200크기로 만들어진 기념관에선 안 의사의 일생과 사상을 담은 사료는 물론, 안 의사의 이토 저격 현장을 볼 수 있습니다. 또 기념관 출입문 위엔 거사 시각인 오전 930분에 멈춘 대형 시계도 걸려 있어요.

 

안중근 의사 이야기로 뮤지컬과 영화도 나와 있는데요. 안중근 의사가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한 지 100주년이 되는 2009년부터 공연을 시작한 창작 뮤지컬 <영웅>입니다. 이 작품은 안 의사가 19092월 손가락을 자르는 단지동맹을 맺으며 이토 암살을 계획하고 실행했던 순간부터 19103월 사형이 집행될 때까지의 삶을 재조명해요. 국내 연속 매진 기록을 넘어 뉴욕 브로드웨이 링컨센터 무대에도 올랐을 만큼 호평을 받았다죠.^^ 독립군과 일본군 사이의 쫓고 쫓기는 장면, '장부가'를 열창하고 안중근이 사형 집행을 받는 장면 등이 사람들의 가슴을 울린다고 합니다.

 

-모셔와서 편집한 글

 

하지만 의사께서 서거하시고 한세기가 넘었건만, 의사의 유해마저 찾지 못하는 안타까운 현실....

그저 부끄러울 뿐입니다.

 

의사께서 염원하시던 광복을 맞은지 어언 70주년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의사께서 주창하시던 동양평화는 아직도 요원하고, 조국은 두동강이 나서 서로 으르렁거리고, 친일파들의 득세는 지금도 이어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너무 괘념치 마시고, 광복의 기쁨만을 생각하시며 평안히 영면하시길 비는 마음입니다.

 

오늘이 광복 70주년이라서 잠시 의사님의 행적을 살펴보았습니다.

님께서 의연한 자세로 부르시던 만세삼창이 눈앞에 그려집니다.

 

저 높은 곳을 향하여/이영화

https://www.youtube.com/watch?feature=player_detailpage&v=PZfyoiUGDKU