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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극기와 독립문-도안과 상징들

서까래 2010. 3. 29. 15:27

태극기와 독립문-도안과 상징들
 본문
황제가 즉위하면서 여러 의례와 상징들이 바뀌었다. 궁중 용어는 황실의 용어로 바뀌었다. 조선시대 왕의 명령인 교(敎)와 교서(敎書)를 황제의 명령인 칙(勅)과 칙서(勅書)라고 했고, 전하, 왕비, 옥책문, 사와 직, 즉조당 등을 폐하, 태후, 금책문, 태사와 태직, 태극전 등으로 바꾸어 불렀다. 또한 왕세자와 왕세자빈은 황태자와 황태자비로 책봉되었다. 고종의 왕자인 장귀비 소생 강과 엄귀비 소생 은은 1900년에 각 의왕와 영왕으로 봉해졌다.
종래 국왕과 대군주 폐하가 사용하던 어새와 어보의 장식도 모두 바뀌었다. 이전까지 조선 국왕이 쓰던 국새는 국왕이 즉위할 때 중국의 황제가 하사한 것이었다. 장식도 장수를 상징하는 거북이었다. 그러나 대한제국의 황제가 등장함으로써 어새의 장식은 천자를 상징하는 용으로 바뀌었다. 대한국새는 가로·세로 각 9.6㎝의 정사각형이며 ‘大韓國璽’라는 글자를 새겼다.
국새는 국사에 사용하는 왕의 인장으로 임금이나 임금이 지정하는 관원이 나라의 중요한 문서에 사용했다. 국가의 표상과 국왕의 권위와 정통성을 상징하는 것으로 사대교린의 외교문서 및 왕명으로 행해지는 국내 문서에 사용되었고, 왕위계승 시에는 전국의 징표로 전수되었다. 또 왕의 각종 행차시에는 행렬의 앞에서 봉송되기도 했다.
고종이 타던 수레가 용교(龍轎)로 바뀌고, 왕에게 올리는 옥책문이 금책문으로, 오얏꽃(李花)이 왕실을 상징하는 문양으로 등장해 각종 집기를 장식했다. 나라의 각종 공문서 양식과 용어도 바뀌었다. ‘조선국’ 혹은 ‘왕’과 ‘대군주폐하’로 된 양식이 ‘대한제국’ ‘대황제폐하’로 바뀐 것이다.
고종의 의복에는 색깔 혁명이 일어났다. 국왕을 상징하는 색이 붉은색이었던 반면, 황제를 상징하는 색은 노란색이었다. 환구단의 건물장식은 물론 궁궐 내외의 각종 건축물이나 의복, 장식물 등에 노란색이 흔히 쓰이게 되었다. 국왕이 입던 자주색 곤룡포도 황색으로 바뀌었다. 그 대신 왕이 입었던 자주색 곤룡포는 황태자에게 계승되었다.
왕태자를 황태자로 책봉하고 역대의 고사에 따라 전국의 죄인들에 대해 대사령을 내렸다. 아울러 고 민비는 명성황후로 추존되어 다음달 황후의 예로 장례를 치렀다. 이후 정부에서는 국가와 황제의 어기(御旗), 친왕기(親王旗), 군기(軍旗) 등을 제정했으며, 황제를 대원수로 한 프러시아식 복장과 관복을 제정해 황제의 권위를 높이는 상징물도 제작했다. 고종 황제 면복에는 12장(章)의 문양을 새겼다. 좌측 어깨의 ‘일’(日)은 일상(日象)의 조광(照光)을 상징하며, 우측 어깨의 ‘월’(月)은 불로불사(不老不死)를, 등 중앙의 ‘성신’(星辰)과 산(山)은 각각 충의로운 사람과 진정(鎭靜)을, 상(좌우 각 1)의 ‘화’(火)는 빛나는 밝은 덕을, 상(좌우 각 1)의 ‘조’(藻)는 쌀과 청결과 화미(華美)를, 상(좌우 각 1)의 ‘분미’(粉米)는 사심(私心)이 없으며 양민에 충성을 다함을, 상(좌우 각 2)의 보는 왕의 결단과 의지를, 상(좌우 각 1)의 불은 사심이 없음과 신민(臣民)의 배악향선(背惡向善)을, 어깨(좌우 각 1)와 폐슬(좌우 각 1)의 ‘용’(龍)은 신기변화(神奇變化)를, 소매(좌우 각 3)와 상(좌우 각 1)의 ‘종이’(宗彛)에 새긴 호랑이는 용맹을, 원숭이는 지혜를 상징하며, 소매끝(좌우 각 3)의 ‘화충’(華蟲)에는 상상의 새를 새겨넣었다. (한영우, 《명성황후와 대한제국》, 효형출판, 155쪽 참고)
경운궁의 전각인 중화전의 용상 뒤에는 일월오악도가 그려져 있다. 하늘에 떠 있는 붉은 해와 흰 달은 각각 왕과 왕비를 상징하며, 다섯 개의 봉우리로 표현된 산은 곤륜산으로 임금을 상징한다. 일월오악도의 해, 달, 솔, 물 등은 천계, 지계, 생물계의 영원한 생명력의 상징으로 여러 신의 보호를 받아 자손만대까지 오래도록 번창하라는 국가관의 투영이며, 왕(황)실의 권위를 나타낸 것이다.
대한제국 시기의 대표적인 도안과 상징으로 들 수 있는 것이 오얏꽃 무늬다. 이 무늬는 1885년 전환국이 인천에 있을 때 발행된 동전에 처음 등장했고, 이후 대한제국이 성립되면서 황실의 문장으로 채택되어, 훈장과 우표 등 대한제국기에 광범위하게 쓰였다. 바로 이 시기에 국가를 상징하는 국기 태극기와 함께 독립문에도 이 무늬가 새겨졌다. 따라서 대한제국 황실은 오얏꽃 무늬를 독립문의 완공에 곧 이어 선포된 대한제국 황실의 상징으로 채택할 의향이 분명히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오얏꽃 무늬는 왕족의 성씨인 이(李)씨에서 나온 모티프다. 태극이 오래전부터 사용되어오다가 국가의 상징으로 채택한 데 견주어 볼 때 사용된 예가 거의 없어서 근대시기에 창안한 것으로 보인다. 오얏꽃 무늬는 몇 번 바뀌기도 했지만 대체로 5개의 꽃잎마다 꽃술을 3개 놓고 꽃잎 사이에 또 꽃술을 1개씩 놓은 꼴을 기본으로 했다. 빛깔은 황제의 나라를 의미하는 황금색을 띠게 했다.
이 무늬는 황실을 상징하는 무늬이면서, 국가를 상징하는 것이기도 했다. 먼저 황실을 상징한 예로는 고종황제의 서류함, 덕수궁의 귀빈실로 쓰던 덕홍전의 복국, 석조전의 박공 등 황실에서 사용한 기물과 실내 및 실외에 두루 쓰였다. 따라서 이 무늬는 좁은 의미의 황실을 상징했다.
고종황제가 대한제국의 군통수권자를 겸해 대원수로 취임하면서 원수부 소속의 장관은 황색 바탕에 은실로 오얏꽃 무늬가 수놓인 모자와 견장, 식대 식서 등을 착용하도록 규정되었다. 예복을 입었을 경우 모자에는 처음에는 정면에 붙이는 모표에, 곧 이어 모자 꼭대기에도 이 무늬를 수놓아 사용하도록 했다.
오얏꽃 무늬는 국가를 상징하는 무늬로도 쓰였다. 종이돈, 쇠돈을 막론한 화폐와 나아가 외국과의 통상에 사용되는 우표, 파리 만국박람회의 소개 화보에 실린 건물 기둥에도 이 무늬가 쓰였다. 그러나 국권이 상실되자 오얏꽃 무늬는 더 이상 황실이나 대한제국의 상징이 아니라 왕가의 무늬로만 격하되었다. 그래서 식민지가 된 시기에도 제한적이지만 이왕가미술품제작소에서 만들어진 각종 기물의 무늬로 여전히 사용되었지만 그 의미는 대한제국 시기와는 완전히 다른 것이 되고 말았다. 왕가의 무늬라고 하면 일본왕가인 이른바 천황가와 대등한 지위가 아니라 그보다 한 등급이 낮은 왕족으로 편입되는 것을 의미한다.

 

출처 : 문화원형백과사전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