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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칸트와 신(新) 스콜라철학 - 박진(괴팅엔 대학 Post-Doc.)

서까래 2010. 1. 24. 09:27

 

칸트와 신(新) 스콜라철학 -   박진(괴팅엔 대학 Post-Doc.)




I. 머리말

흔히 칸트는 “모든 형이상학의 파괴자”(Allzermalmer)로 불리어져 왔다. 그것은 그의 주저 『순수이성비판』(Kritik der reinen Vernunft)이 일견 모든 형이상학에 대한 비판으로 비쳐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모든 형이상학” 안에는 고대의 형이상학 전통이나 중세의 스콜라철학은 물론 특히 칸트 당대에 라이프니츠-볼프학파로 대변되는 프로테스탄트적 강단 스콜라철학도 포함된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이미 라이프니츠-볼프 형이상학에 익숙해있던 당대의 강단 철학자들이 모든 형이상학 체계를 좌초시키는 것으로 여겨지는 칸트철학에 반발했던 것도 사실이며, 칸트 이후 전통 형이상학을 고수하는 스콜라철학자들의 첫번째 반응 역시 거부적인 태도취함이란 점은 마찬가지였다 .

주지하다시피 순수이성비판의 전반부인 분석론까지의 성과가 우리 인식의 한계를 경험의 영역 내에 한정했다면, 후반부인 변증론 부분은 경험의 한계 넘어에로 적용된 이성 사용에서 기인한 오류를 폭로하는 치밀한 비판을 수행하고 있다. 변증론에 앞서 분석론의 부록으로 삽입된 <반성개념장>에서도 경험의 내용들을 고려함이 없이 사변적 이성에 의해 기도된, 보다 정확히 말하자면, 특히 라이프니츠-볼프 형이상학 체계 속에서 사변적 반성의 도구로 사용된 동일과 차이, 일치와 모순, 안과 밖, 질료와 형식과 같은 반성개념들의 오용을 비판적으로 다루고 있는데, 이는 변증론에서 칸트가 수행하고 있는 바, 종래 이성적 영혼론(psychologia rationalis), 이성적 우주론(cosmologia rationalis), 이성적 신학(theologia rationalis)과 같은 특수 형이상학(metaphysica specialis)이 범한 오류들에 대한 비판에 앞서 형이상학 일반 내지 존재론에서 사용된 반성의 원리인 “반성개념들”과 이성 사용 일반에 대해 전체적인 시야에서 선행적인 비판을 수행함으로써 변증론의 시각을 보완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즉 <반성개념장>을 통해 칸트는 변증론에서 수행하고 있는 특수형이상학에 대한 비판에 앞서 일반 형이상학(metaphysica generalis) 즉 존재론(ontologia)에 대한 원리적인 비판을 삽입시킴으로써 형이상학 전체에 대한 총체적인 비판을 체계적으로 완성하고 있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의 주저에서 보여지는 이와 같은 형이상학에 대한 주도면밀한 비판에도 불구하고 사실상 형이상학에 대한 칸트의 태도를 일면적으로 단지 부정적인 것이라고 속단해서는 안된다. 무엇보다도 강조되어야 할 중요한 사실은 칸트가 자신의 철학을 특징짓는 말로 즐겨 사용한 “초월철학” 내지 “초월적”(transzendental)이라는 용어 자체가 바로 수아레즈(Franz Suarez, 1548-1617)를 거쳐 라이프니츠-볼프학파로 전승된 중세 스콜라적인 “초월자이론”(Transzendentalienlehre)에서 유래했다는 사실이다.

칸트 자신이 이미 비판의 서론에서 비판의 궁극적 과제를 “학문으로서 형이상학이 어떻게 가능한가?”(B22)라는 물음으로 제시함으로써 형이상학에 대한 긍정적 관심을 표명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비판 이후 쓰여진 현상논문 “라이프니츠-볼프 시대 이래 독일에서 형이상학이 이룩한 현실적인 진보는 무엇인가?”(1791)에서는 “모든 선험적 인식 일반의 가능성에 관한 이론인 초월철학(Transzendentalphilosophie) 즉 순수이성비판은 형이상학의 정초(die Gründung einer Metaphysik)를 그 목표로 한다”라고 보다 적극적으로 명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더욱이 비판 이후 생겨난 많은 오해로 인해 스스로 비판의 핵심 사상을 압축하여 서술한 해설서인 프롤레고메나(Prolegomena)(1783)의 표제가 함축하고 있듯이, 종래의 독단적 형이상학에 대한 비판의 시도는 다른 한편으로 새로운 형이상학의 건설을 위한 전주곡이요, 그것을 예비하는 전초 작업이기도 했다. 이런 맥락에서 새로운 형이상학을 예비하는 반성 수행인 “순수이성비판” 자체가 바로 일반 형이상학적 반성 수행임을 명확히 하기 위해, 칸트는 헤르츠(M. Herz)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순수이성비판을 “형이상학에 대한 형이상학”(die Metaphysik von der Metaphysik)이라고 명명하기도 했던 것이다.

이와 같은 칸트철학의 스콜라적 형이상학에 대한 이중적인 태도와 관심 즉, 부정적 파괴적 측면과 적극적이고도 건설적 측면이라는 두 측면과 연관하여 칸트 이후의 스콜라철학자들이 칸트에 대해 취한 태도 역시 크게 두 가지 경향을 띠고 나타난다. 그것은 칸트철학에 대해 부정적이고 소극적인 거부의 태도와 종래의 스콜라적 전통에 동화 수용하고자 하는 적극적 태도가 바로 그것이다.

이제 이하에서 필자는 칸트 이후 스콜라철학자들이 취한 두 입장, 즉 칸트에 대해 공개적으로 부정적인 태도를 취한 입장(II)과 스콜라적 전통 속에 동화시키고자 노력하는 수용적 태도(III)의 두 입장을 개관하고, 나아가 이와 같은 거부와 수용의 일방적인 두 해석의 태도를 넘어서서, 옛 초월철학과 칸트 초월철학의 내면적 연관성(IV)을 칸트 철학의 형성 과정과 그 체계 구성 원리로부터 해명해줌으로써, 양자의 연관성을 새롭게 부각시키고자 한다.
혹자는 실존철학, 현대의 새로운 존재론적 경향, 해석학, 포스트모더니즘 등 오늘날 유럽의 주된 철학적 경향과 칸트의 관계를 다루지 않고 오히려 이미 과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듯한 스콜라철학의 전통과 칸트의 연관성을 다루는 필자의 글이 오늘날의 철학적 작업에 어떤 의미가 있는지 의아해 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모든 존재자 일반에 타당한 초범주적 술어들을 다루는 초월자이론(Transzendentalienlehre)을 그 핵심으로 하는 스콜라적 전통은 칸트에 있어 범주론의 연역과 비판적 존재론의 구상에 결정적인 역할을 수행했을 뿐만 아니라, 범주론의 체계화와 그 타당성에 대해 관심을 갖는 오늘날의 새로운 존재론의 모색에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보인다. 그리고 이와같은 스콜라적 초월철학의 전통과 칸트의 연관성에 대한 연구는 그동안 소흘히 되어 온 칸트 철학의 역사적 형성과정에 대한 연구에 중요한 기여가 될 뿐만 아니라 낡은 스콜라적 전통으로부터 새로운 의미를 발견함으로써 오늘날 칸트에 대한 존재론적 해석의 경향에도 새로운 자극이 될 것이며, 칸트를 서구 형이상학의 역사 속에서 특히 오랜 초월철학의 전통 속에서 올바로 자리매김하는 데도 적극적인 기여가 될 것 임을 밝히고자 한다.


II. 공개적인 칸트 반대자

앞서 언급했듯이, 모든 형이상학을 좌초시키는 것으로 여겨지는 칸트철학에 대해 칸트 이후 전통 형이상학을 고수하는 스콜라철학자들의 첫번째 반응은 거부적인 태도취함이었다. 칸트 사후 스콜라철학자들의 반응은 프로테스탄트적 입장에서든 가톨릭적 입장에서든 마찬가지로 공개적으로 반발하는 부정적 입장이 지배적이었다. 이 글의 목적이 신스콜라철학의 모든 문헌들의 체계적 정리를 목표로 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여기서는 몇몇 대표적인 반대자들에 대해 간략히 다루고자 한다.

최초의 공개적인 반대 입장을 표명한 사람은 가톨릭 신학자인 슈타틀러(B. Stattler)였다. 그는 칸트의 순수이성비판 재판(1787)이 출간된 다음해인 1788년 『안티-칸트』(Anti-Kant)라는 저술을 출판했는 데, 그는 자신을, 칸트보다 20년이나 앞서 철학을 학문으로 만들고자 논리학과 형이상학의 모든 오류들을 검사하는 데 “말할 수 없을 만큼의 노고”(unbeschreibliche Mühe)를 치뤘던 선각자로서 자처하며, 칸트의 저작에 대비해 자신의 저작이 인정받지 못함에 대해 불평 섞인 비난을 가하고 있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나는 칸트와 거의 연배도 같고, 우리 두 사람은 오랜 기간을 모든 학문 중에서 가장 중요한 두 학문 즉 논리학과 형이상학을 개선시키는 데 큰 노고를 치뤘다는 점에서도 공통적이다. 그러나 큰 차이점은 그가 같은 일을 거의 신용 없이 수행하여 명예와 명성을 얻기 시작했지만, 나는 바로 그 일을 최초로 수행했음에도 그에 합당한 평가를 받기위해 노력하고 있다는 점이다.”

슈타틀러는 『안티-칸트』 2권에서 자신을 “고유한 철학 체계” 뿐만 아니라 “성스러운 이론”의 소유자로서 자처하며 만일 칸트가 자신의 저작을 읽었다면 더 이상 철학에 매진하려 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주장한 후, 칸트의 저작을 다음과 같이 가치 절하시키고 있다.

“새로운 것들에 대해 설교(dogmatisiert)하고자 하는 자의 머리가 충분히 성숙하지 못했을 때는, 아무런 지혜도 빛을 발하지 못한다. 칸트씨(Hr. Kant)께서 충분히 성숙한 두뇌를 갖지 못했다는 사실을 그의 [순수이성]비판에 대한 이와 같은 반박이 이미 부분적으로 증명하는 것이다. 그의 비판에서 그가 쓴 단 하나의 명제도 거의 온전히 살아남기 어렵다.”

그러나 가톨릭 신학자는 다음과 같은 칸트의 언급에 귀기울일 필요가 있었다.

“형이상학은 어린아이나 청소년들을 위한 것이 아니라 단지 어른들의 전유물이요, 이성의 자기 검열의 한 방식일 뿐이다. 사람들이 그 타당성을 평가할 수 있기 위해서는 이미 그것을 알아야 하지만, 신학자는 아무런 형이상학도 필요치 않는다. 보다 단순할수록, 보다 경험적 원칙에 가까울수록, 그만큼 더 유익하다.”

칸트와 자신을 동일 지반 위에 놓고, 보다 적절히는 자신을 칸트보다 더 높은 위치에 놓고 행해진 슈타틀러의 칸트에 대한 평가는 “독단적인” 사변형이상학의 비판자이자 도덕적 실천 형이상학에로의 새로운 길을 열어 놓고자 했던 칸트의 입장을 근본적으로 이해하지 못한데서 출발한 부적절한 평가였다고 볼 수 있다. 즉 슈타틀러의 불평 섞인 비난은 칸트에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당대의 현학적이고 이론적인 형이상학자와 신학자들과 누구보다도 바로 자기 자신에게 해당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한편 가톨릭 진영의 예수회 교단에서는 칸트를 “진정한 프로테스탄트”(echter Protestant)로, 또는 “예수회 신도”(Jesuit)로 간주하기도 했다. 예수회 소속의 스콜라철학자 페쉬(Pesch)는 칸트를 프로테스탄트와 동일시하는 해석을 대변했다. 『근본으로부터 고찰된 현대의 학문』(부제: Philosophische Darlegung für weite Kreise)(1876)이란 책에서 그는 슈타틀러와 근본적으로는 동일한 지반에 서서 칸트의 진정한 가치를 폄하하고 있다.  

“편견없이 그 가치를 평가한다면, 그 마지막에는 칸트의 비판이 우리 앞에 하나의 거대한 망령(großartiger Geist)으로, 기괴한 정신착란(großartige Delirium)으로 서있을 것이다.”  

그런데 페쉬는 이 “쾨니히스베르그 출신의 작고 메마른 소인”(das kleine dürre Männlein zu Königsberg)을 “진정한 프로테스탄트”(echter Protestant)로서 간주하고자 했다. 왜냐하면 그들의 눈에는 칸트가 “참된 그리스도교”의 기초를 전복시키고, “신에 대항하는 혁명적이며 위선적인 인문주의자”(der gegen Gott revolutionierende gleißnerische Humanitätskult)요 “종교개혁의 아들”(ein Kind der Reformation)로서 여겨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런 평가를 과연 그가 말하듯이 칸트에 대한 “편견없는”(vorurteilsfrei) 가치평가라고 볼 수 있을까? 이는 오히려 선입견에 물든 자신의 입장에서 내려진 일방적인 평가가 아닌가?. 즉 페쉬는, 칸트가 순수이성비판 서문에서 비판을 통해 모든 종류의 “유물론, 숙명론, 무신론, 불신앙과 광신, 미신 등을 근절시킬 것”(BXXXIV)을 목표로 하고 있다고 밝혔음에도 불구하고, 당대에 칸트의 태도가 신에 적대적이라는 생각을 대변하는 사람이었다. 페쉬에 따르면, 칸트의 태도가 신에 적대적인 이유는 칸트가 진짜 프로테스탄트요 그의 이론이 인간을 우상화하여 숭배하는 인간중심주의(Humanitätskult)에서 유래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는 심지어 칸트를 인간을 유혹하는 “악마”(Teufel)와 동일시하기도 하고, 이 위대한 독일철학자와 그의 이성비판의 영향을 “마술적인 속임수”(Zauberdunst)로서 단정하는가 하면, 칸트를 출발점에서부터 신에 적대적이며 “모든 것을 파괴하는자”(Allzermalmer)에 비유하기도 했다.

예수회 교단 안에서 칸트 반대자의 진영에 페쉬만이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빌만(O. Willmann) 역시 칸트에 대한 편견을 갖고 있었다. 그는 『이상주의의 역사』(1897)라는 책에서 오늘날의 신스콜라철학자들의 입장과는 정반대로 칸트를 “무신론자”(Atheisten)로 특징지우고, 칸트와 계몽사상을 “오늘날 프로테스탄트적 독일의 사회적 분열의 원인”으로 평가한다. 더욱이 독일의 가장 위대한 철학자 중의 한사람이었던 칸트에 대한 그의 철학사적 평가는 놀랍기까지 하다. 칸트를 “진정한 독일 철학자”로 간주하는 일반적인 평가에 대해서도 그는 다음과 같이 반대하고 있기 때문이다.

“칸트를 참된 독일철학자로 높이 평가하는 소박한 태도는 정말 어리석은 것이다. 칸트는 코스모폴리탄이었다. 영국인을 추종했고, 루소에게 열광하였으며, 프랑스혁명에 도취되었고, 독일인의 이름에 영예를 가져다 준 라이프니츠의 이론을 논박하였다. 칸트의 근본적인 궤변(Sophistik)은 독일인의 충직함과는 전혀 그 반대 위치에 서있다 ”  

한편으로 예수회 소속 신학자의 입장에서 칸트를 무신론자로 몰아 붙였던 빌만은 이번에는 민족주의자의 관점에서 칸트를 비난하고 있다.
스콜라철학의 전통에 서 있는 당대의 형이상학자들이나 신학자들에게 애초부터 칸트의 이성비판이 정당한 평가를 받기는 어려웠다. 그의 비판은 전통적인 교리(Dogma)에 쟁론과 불화를 초래할 소지가 컸기 때문에 칸트의 비판은 가톨릭 교단에 위협으로 느껴졌다고 보인다. 따라서 스콜라학자들이 칸트에 대해 취한 최초의 태도는 가급적 칸트에 대해 거리를 두고 생겨날 소지가 있는 쟁론과 분열을 막는 데 있었다고 볼 수 있다.  


III. 수용적 입장

전통 형이상학과 스콜라철학을 고수하는 가톨릭의 진영에서도 일방적으로 칸트를 배척하기 보다는 점차 칸트를 수용하고 스콜라철학의 전통에 동화시키고자하는 시도가 이루어 졌다. 그러나 이렇듯 공개적으로 칸트에 적대적인 태도로부터 동조적인 입장으로의 전환이 급격히 이루어진 것은 결코 아니었다.

분트(H. Bund)의 저술, 『가톨릭 철학자로서의 칸트』(1913)는 아마도 그 최초의 시도로 보인다. 그는 종래 예수회소속 신학자들이 칸트를 무신론자로, 영국 경험론에 영향을 받은 유물론자로 폄하시켰던 것과 달리 칸트를 “예수회신도”(Jesuiten)로 동화시키고자 하는 목적을 갖고 있었다. 그는 독자로 하여금 난해한 자신의 논의들을 따라오도록 설득한 후 자신의 책 말미에서 칸트에 대해 다음과 같은 주장에 일방적으로 동의하도록 요구한다.

“앞으로는 지금까지의 방식으로가 아니라 단지 쾨니히스베르그의 예수회신도(Jesuiten von Königsberg)로서만 불려질 것이다.”

칸트철학을 수용하고자 하는 노력은 프로테스탄트 진영에서도 수행되었다. 아마 그 최초의 노력은 가톨릭 진영의 분트 보다 훨씬 앞서 1900년에 출간된 파울젠(Fr. Paulsen)의 논문 “칸트 개신교의 철학자”(1900)였다고 보인다. 논문은 가톨릭 교회의 “정신적인 절대주의”에 대항한 격렬한 논쟁으로부터 시작된다.

“나는 바보주의(Idiotismus)가 진보의 원리이자 세계를 지배하는 강력한 힘이 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파울젠은 칸트를 “독일인의 정신적 삶에 없어서는 안될 寶庫가 된 형태의 이상주의의 정초자”(Begründer des Idealismus)로 평가하고, 가톨릭 진영에 속한 빌만의 저서 『이상주의의 역사』(1897)에서 보여진 칸트에 대한 부정적 평가에 반발하여 날카로운 비판을 전개하기도 했다. 그는 스콜라철학이 칸트에 의해 단적으로 무화되었다고 평가하고, 가톨릭 진영의 해석, 특히 칸트를 토미즘에 동화시키려는 경향으로부터 칸트철학을 보호하고자 시도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톨릭 진영에서 칸트를 토미즘에 동조시키고자하는 노력은 꾸준히 지속되었다.

프르치바라(E. Przywara S. J.)는 자신의 책 “오늘날의 칸트”(1930)라는 책에서 개신교도였던 파울젠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칸트로부터 토마스 아퀴나스에 도달하고자 하는 과제를 제시한다. 따라서 그는 오히려 칸트와 개신교를 결부시키는 것에 대해 반대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의 논박은 중립적이며 자제되고 있다. 그는 칸트의 사상 안에서 “두 가지 화해할 수 없는 신앙심의 대립”과 마주친다. 프르치바라에 따르면 종교개혁적 신앙심과 계몽주의적인 신앙심이 그것이다. 그는 시간적으로도 거리상으로도 상당히 멀리 떨어져 있는 것처럼 보이는 칸트와 토마스의 신앙심을 신비적인 사유방식 안에 끌어들여 다음과 같이 특징짓는다.

“구원을 확신하는 깊은 신앙심으로부터 유래한 고뇌에 찬 구성의 철학(Philosophie angsthafter Konstruktion),- 초월에로 열린 개방성의 철학, 무한성과 개념화할 수 없는 신에게로 신앙심에서 우러나온 몰아적인 자기증여.(aus Frömmigkeit selbstvergessener Hingabe an den Majestäts Gott der Unendlichkeit und Unbegreiflichkeit)”  

그러나 이와같은 칸트철학의 신비화는 칸트철학에 대한 공정한 평가와 해석의 시도라고 보기 어렵다. 이는 예수회소속의 신부로서 “구원을 확신하는 깊은 신앙심”을 갖고 있는 저자가 자신의 관심을 투영해 넣은 자의적인 칸트 해석의 시도라고 보이기 때문이다. 칸트가 비판을 통해 모든 종류의 “유물론, 숙명론, 무신론, 불신앙과 광신, 미신 등을 근절시킬 것”(BXXXIV)을 목표로 하고 있다고 밝혔음에도, 칸트에 반대하는 종래 스콜라학자들이 일방적으로 칸트를 무신론자로 몰아 부쳤다면, 이제 칸트는 자신들의 입장에 동화시켜 해석하고자 하는 이들에 의해 칸트 스스로는 거리를 두고자 했던 신비주의자로서 일방적으로 간주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칸트가 신비주의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음을 이 신앙심 깊은 신부님은 알지 못했거나 알고자 하지 않았을 것이다.

“신적인 계시에 의한 앎을 수동적 인식의 수단이라고 주장하는 자는 초감성적인 경험의 가능성이라는 불가능한 것(Unding)을 생각하는 것이요 ...  모든 철학의 정반대(das gerade Gegenteil aller Philosophie)인 일종의 신비주의(Mystik)라고 불리는 비밀스러운 이론에 발을 붙이고 있는 것이다. 그는 이성적이지만 그러나 수고스러운 자연탐구의 노동을 그만둔 채 (연금술사처럼) 향유의 달콤한 상태 속에서 황홀한 꿈을 꾸는 거대한 착상을 세운다.”

역시 예수회 소속의 이나우엔(A. Inauen)은 칸트의 저작들을 섭렵한 후 그 가운데서 칸트가 스콜라철학에 관심을 갖고 있었음을 입증하고자 시도한다. 그는 칸트가 스콜라철학을 공격하고 있는 대목에 주목하고 다음과 같이 결론을 내린다. 그의 중요한 지적은 칸트의 공격이 단지 라이프니츠-볼프의 독단적 합리주의에 의해 변용되어 수용된 스콜라철학에만 정향되어 있다는 점이다. 따라서 토마스로 대변되는 스콜라철학의 오랜 전통과 결코 대립적이지 않다는 점이다. 이런 해석에는 수긍할 여지가 있다고 보인다. 그러나 그는 여기서 한걸음 더 나아가 토마스를 모든 점에서 칸트의 선구자로서 위치지운다.

“칸트는 낡은 스콜라철학과 이에 뒤따르는 근대 철학이라는 양자택일을 (감성 아니면 지성이라는 양자택일을 해소시켰듯이) 또한 해소시켰다. 마치 성 토마스가 그랬던 것처럼.”

또 그는 칸트가 수행한 신존재증명에 대한 비판이 단지 논증의 형식에 관한 것이며, 따라서 칸트는 신존재증명의 지주를 파괴시킨 것이 아니라 오히려 명백히 인정하고 있다고 간주한다.(마치 토마스가 그랬던 것처럼!)
그러나 이런 해석은 자의적이고 다소 강압적인 해석이라고 보인다. 토마스의 철학이 칸트철학과 접목될 수 있는 부분이 있다 하더라도 모든 점에서 모범이 될 수만은 없는 것이다.  페쉬와 빌만이 칸트를 무신론자로 만들었고, 분트는 칸트를 가톨릭 철학자이자 예수회신도로 각색했으며, 프르치바라가 칸트를 신비주의자로 분장시켰다면, 이제 이나우엔에 의해 칸트는 말하자면 “토마스 아퀴나스의 제자”가 된 셈이다.아마도 오늘날 칸트철학을 스콜라철학의 전통 속에 용해시키려는 노력의 결정판은 최근 스콜라학자들의 칸트연구 성과들을 모아 로츠(J. B. Lotz S. J)의 편집에 의해 1955년에 출판된 『칸트와 오늘날의 스콜라철학』(1955)을 꼽을 수 있을 것이다.

우선 예수회 소속의 브리에스(de Vries S. J.)는 “칸트와 토마스의 인식이론”이라는 제목의 논문의 서두에서 “어떤 연관에서 볼 때, 칸트는 라이프니츠나 아우구스티누스보다 사실상 토마스의 사유에 더 가깝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리고 이 미심쩍은 “어떤 연관”이란 구체적으로 “인식론”의 관점을 말한다고 부연하고 있다. 그리고 그는 두 철학자의 인식론의 공통점으로 인간 지성의 추론적 성격, 감각 인상을 수용하는 구조, 지성의 개념에 의해 감각 인상이 종합되어 대상의 무엇임(quidditas)이 파악되는 구조 등을 비교 검토하고 끝으로 양자의 차이점에 대해서도 논하고 있다. 이 책의 또 다른 필자인 슈무커(J. Schmucker)는 “칸트 윤리학에 있어 형식주의와 질료적 목적원리”라는 논문에서 칸트의 윤리학을 네오토미즘의 입장에 동화시키고자 시도한다. 그는 우선 칸트 윤리학에서 형식주의의 본질과 의미를 해명하고, 질료적 원리와 형식주의의 원리와의 관계, 칸트의 “도덕 형이상학”에서 질료적 목적론을 검토한 후, 끝으로 칸트 윤리학과 스콜라철학의 도덕적 원리론을 비교하고 있다.

이 글의 성격상 개별 논문들에 대한 상세한 해설이나 비판 보다 위 논문들을 수록한 책의 기획자이자 편집자이기도 한 로츠(J. B. Lotz)의 입장과 그의 칸트 해석의 관점에 대해 언급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로츠는 의심의 여지 없이 오늘날 가톨릭 진영에서 예수회를 대표하는 지도적인 철학자의 한 사람이라고 여겨진다. 그는 칸트 연구에도 조예가 깊은 인물이며, 그의 식견과 깊은 통찰력에 대해서는 칸트 전문가들도 귀기울여야 할 바가 있다고 여겨진다. 로츠는 “칸트의 위대함과 한계”라는 제목의 글에서 칸트를 다음과 같이 평가한다.

“칸트는 오늘날의 상황에 적절한 사유를 수행하고자 하는 자가 결코 그와의 대결을 지나쳐버릴 수 없을 만큼의 위대한 크기를 지니고 있다. 그러나 동시에 깊고 날카로운 한계를 지님을 간과해서는 안되며, 따라서 진리에 대한 책임을 의식하는 사유는 칸트와의 대결을 통해서만 자신의 영향력을 열어보일 수 있다.”

여기서 로츠가 칸트와 “대결”을 의식하는 근저에 놓인 준거점은 토미즘이며, 그가 의식하는 칸트 철학의 “한계” 역시 이런 관점에 기초하고 있다고 보인다. 따라서 그의 칸트 해석의 근본 정향이 토마스와 동화시키고자 하는 데 있는 한, 그 기본 입장에서 로츠는 앞서 언급한 프르치바라와 일치한다고 보인다. 그 역시 다음과 같이 칸트를 토마스에 동화시켜 해석하고 있다.

“그의 시대가 제공하는 서로 상이하며 상충하는 사유동기들을 하나의 근본적인 구상 안에 결합시킨다는 이 점에서 칸트는 중세의 강력한 사유 종합을 수행한 토마스 아퀴나스와 가깝다고 비교될 수 있다.” “오랫동안 사람들은 칸트에게서 항상 단지 신존재증명의 파괴자만을 보았다. 즉 사람들을 경험계에만 국한시키고 경험계 넘어에로의 넘어섬 내지 초월을 금지시킨 자로만 간주했다. 그러나 사실상 칸트는 참된 비-합리적 형이상학(der wahren nicht-rationalistische Metaphysik)에 길을 마련해주기 위해  잘못된 합리적 형이상학을 파괴하고자 원했다.”

로츠 역시 칸트 연구가이기에 앞서 토마스주의자인 한에서, 토마스의 철학과 동화시키고자 하는 그의 관심을 칸트철학 안에 투영시켜 해석함으로써, 칸트가 “비-합리적 형이상학”에로의 길을 열어 놓았다고 해석하고 있는 데, 이런 강압적 해석은 마치 프르치바라가 칸트를 “신비주의자”로 해석했던 것에 비견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런 한에서 로츠 역시 “고뇌에 찬 구성의 철학”으로 칸트 철학을 재해석하고 있다는 혐의를 벗기는 어렵다고 보인다.


IV. “옛사람의 초월철학”과 칸트의 초월철학

이 글에서 특히 필자가 부각시키고자 하는 결코 간과되어서는 안될 중요한 철학사적 통찰은, 칸트가 자신의 철학 체계 구상을 표명한 1772년 이후는 물론 이전부터 오랜 기간의 반성 속에서 라이프니츠-볼프학파의 형이상학을 매개로 전승된 종래 스콜라적 존재론의 핵심 개념인  일자(unum), 진리(verum), 완전성(perfectum)과 같은 초월자들(transcendentalia)이 동일과 차이(idem et diversa), 질료와 형식(materia et forma)과 같은 반성개념들과 더불어 범주론의 체계화에는 물론이려니와 그의 전 초월철학(Transzendentalphilosophie)의 건축술을 완성하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또한 여타의 전문 용어들과 마찬가지로, 무엇보다도 칸트가 자신의 철학을 즐겨 일컫는 “초월철학”(philosophia transcendentalis)이라는 명칭이나, 그가 자주 사용하는 “초월적”(tranzendental)이라는 용어도 바로 중세 스콜라적 형이상학의 전통 속에서, 일자, 진리, 선과 같은 초월자들을 다뤘던 옛 초월자이론(Transzendentalienlehre)으로부터 유래한 것이며 칸트는 이에 대한 오랜 기간에 거친 비판적인 숙고와 진지한 반성을 거쳐 이 개념을 고유하게 자신의 것으로 수용했다고 볼 수 있다.

예컨대 그가 여러 곳에서 언급했지만, 순수이성비판 제2판의 범주표 주석(§12)에서 자신의 초월철학과 구별하여 또 다시 “옛사람의 초월철학”(Transzendentalphilosophie der Alten)(B113)에 대해 언급했을 때, 그가 염두에 두고 있는 것은 바로 중세의 스콜라적인 초월자이론임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또 칸트가 모든 범주들을 체계적으로 도출한 후, 그의 “초월철학”의 핵심인 바, 모든 존재자(대상)에 대한 범주의 타당한 적용가능성을 정초하고자 시도하는 자신의 작업을 “초월적 연역”(transzendentale Deduktion)이라 명명하면서 “초월적인 자아”, 즉 통각의 근원적인 종합 통일 활동에 대해 언급할 때, 여기서 말해지는 “통일”(transzendentale Einheit)은 양의 범주의 하나인 단일성 개념과 구별하여 “질적인 통일”(qualitative Einheit)(B114)로서 특징지워지며, “우리는 (질적인 것으로서 §12) 이러한 통일을 한층 더 높은(noch höher) 데서 찾아야 한다.”(B131)고 부연하고 있다. 여기서 자의식의 초월적 통일을 칸트가 “질적 통일”로 규정할 때 그가 염두해 두고 있는 것도, 스콜라 철학에서 존재(ens), 진리(verum), 선(bonum)과 같은 초월적 규정들의 하나로 간주되어 온 초월적인 일자(unum transcendens)라는 점을 놓쳐서는 안된다.

전통적으로 “모든 존재자와 類개념을 초월”하면서도 “모든 존재자에게 필연적으로 속하며”, 모든 “범주를 초월”(transcendunt categorias)하지만 “범주적 영역 일반에 관계할 수 있는” 가장 보편적 술어들을 초월자들(Transzendentalien)이라 불러왔다. 서양철학의 역사 속에서 이들 술어들이 “트란첸덴치아”(transcendentia)라고 불려지게 된 것은 토마스 아퀴나스의 스승인 알베르투스 마그누스(Albertus Magnus; 1206~1280)에 의해서이며, 본래 신에게만 적용할 수 있는 술어로서 여타의 것들에는 단지 유비적으로만 사용될 수 있는 것으로 간주했다. 토마스 아퀴나스(Thomas Aquinas)는 여기에 “사물”(res)과 “어떤 것”(aliquid)을 추가하였고, 이것들이 범주적 관계와 명확히 구별되어 “트란첸덴탈리아”(transcendentalia)로 불려지게 된 것은 둔스 스코투스(Duns Scotus)에 의해서다. 둔스 스코투스는 존재(ens)를 가장 보편적인 술어로 간주하고 나머지 초월적 술어들을 단일한(unicis) 술어에 속하는 것(unum, verum, bonum)과 상반적인(disiunctis) 술어에 속하는 것(idem vel diversum, contingens vel neccessarium, actus vel potentia)으로 초월자들의 체계적인 구분을 시도했다. 이런 체계화의 시도가 18세기 독일의 강단 형이상학에도 전승되어 볼프 형이상학의 제1부인 존재론의 핵심을 이루며, 바움가르텐도 가장 보편적 술어들인 초월자들을, 한 사물의 내적 본질을 이루는 내적 술어들(praedicata interna)과 타자와 관계 속에서 한 사물에 귀속하는 관계적 술어들(praedicata relativa: idem et diversa, simultanea, successiva, causa et causatum)로 체계적으로 구분하고 있는 데, 전자는 다시 보편적인 술어(universalia: unum, ordo, verum, perfectum)와 상반적인 술어(disiunctiva: neccesarium et contingens, reale et negativum, singulare et universale, totale et partiale, substantia et accidens, simplex et compositum, finitum et infinitum)로 구별된다. 이런 전승된 초월적 술어들 안에는 칸트에 이르러 범주로 간주되는 것(reale et negativum, substantia et accidens, causa et causatum, neccesarium et contingens)과 범주 연역의 원리가 되는 것(unum, verum, perfectum), 그리고  반성개념(Reflexionsbegriffe) 쌍으로 체계화되는 것들(idem et divera)이 섞여 있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초월자이론은 칸트의 초월철학 즉 새로운 존재론의 반성수행 속에서도 그 모태이자 체계 건축의 원리가 되고 있는 것이다.

중세 초월자이론에 따르면, 이런 초월적 술어들은 서로 교환가능한 것(ens et unum convertuntur)인 바, 모든 있는 것(ens)은 자신과 관련해서 그 무엇 즉 사물(res)이며, 분할을 거부하는 일자(unum)요, 그런 한에서 다른 것과 관련해서 구별되는 어떤 것(aliquid)이며, 근원적으로 신의 정신에 의해 인식되어 있고 또한 파생적으로 인간 이성에 의해 인식될 수 있는 한 참(verum)이요, 의지와 관련하여 좋음(bonum)이다.

칸트는 순수이성비판 초판(1781)에서는 이들 개념들에 대해 언급하지 않았으나, 6년 뒤에 출간된 재판(1787)에서는 범주표에 대한 주석 말미에 삽입한 §12절에서 스콜라철학자들에게 잘 알려진 명제인 “모든 존재는 하나요, 참되며, 선하다[완전하다]”(quodlibet ens est unum, verum, bonum[seu perfectum])라는 원리에 대해 외관상 비판적인 평가를 수행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외관상 비판적인 평가에도 불구하고, 무엇이 칸트로 하여금 이 절을 재판에서 삽입하도록 만들었는가? 순수이성비판의 체계 안에서 도대체 §12절의 의미는 무엇인가?

칸트는, 비록 이 원리에 의해 스콜라학자들이 사물 자체의 선험적인 성질을 인식하려 시도했지만 “이 원리의 사용이 그로부터 이끌어져 나온 결과를 고려해 볼 때(그것은 전혀 동어 반복적인 명제만을 제공해주므로) 매우 빈약한 것이어서 오늘날은 단지 체면상 형이상학 속에 다루어지고 있을 뿐”(B113)이라고 평가하고, 이 원리를 사물을 인식할 때 “인식이 자기 자신과 일치하기 위해 따르는 일반 논리적 규칙”(B116)으로 가치 절하시키고 있는 듯이 보인다. 이런 외관상의 평가에 기초하여 이 절의 중요성을 간과한 채, 페이톤(H. J. Paton)은 “칸트의 일자, 진리, 선 개념에 대한 검토는 단지 그의 논리학 강의와 마이어(G. F. Meier)의 텍스트 속에서 논의된 논리적 완전성(logische Vollkommenheit) 이론과 관련되어 있다”고 해석하고, 켐프 스미스(N. K. Smith)와 마찬가지로 “건축술에 대한 칸트의 열렬한 애호의 한 사례”에 불과한 것으로 평가한다. 또한 탁월한 토마스주의 철학자인 피퍼(J. Pieper) 역시 “철학적 사색의 시선이 그처럼 ‘코페르니쿠스적으로 전환’한 뒤, 옛 존재론의 한 원리의 기원에 대한 연구가 어떤 결과에 도달할 수 있을 것인가?”라고 묻고, 칸트는 존재의 진리(및 통일성과 선함)에 관한 명제를 “사물의 성질”이 아니라 “모든 사물 인식에 대한 논리적 요구와 기준”으로만 타당한 것으로 간주함으로써 “존재 자체의 고유한 속성으로서의 진리가 부정되었다는 것은 명백하다”고 평가한다. 즉 그는 한스 라이제강(H. Leisegang)의 표현을 빌어 이 절의 과제는 옛 존재론의 근본개념들을 “영구히 무효화하는 것”이라고 극단적인 평가를 내린다.

그러나 우리가 주의해야 할 것은 이런 칸트의 언급은 볼프와 바움가르텐에 의해 대변되는 당시 강단 형이상학의 체계 속에서 논리적으로 해석되어 “한갓 공허한 형식으로 남아있는” 초월자이론에 대한 비판적인 평가일 뿐이라는 점이다. 따라서 위에서 언급한 칸트에 대한 평가들은 칸트가 비판 이전과 이후의 다양한 반성 속에서 이들 전통적인 개념들에 관해 오랜 기간 동안 숙고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고려치 못한 성급한 평가들이다. 초월자이론은 스콜라적 기초 위에 세워인 볼프(Chr. Wolff) 형이상학 체계의 제1부, 즉 존재론(Ontologia)의 핵심을 이루는 것이며, 칸트는 자신이 강의교재로 삼았던 바움가르텐(A. G. Baumgarten)의 『형이상학』으로부터 이런 초월자이론이 “존재자의 가장 보편적인 술어들에 관한 학”(scientia praedicatorum entis generalium)임을 이미 잘 알고 있었다고 보인다. 초월자이론은 칸트의 사유가 그 안에서 자라났고 나아가 이를 극복하고자 시도했던 칸트 초월철학의 숨겨진 토대였다. 따라서 외관상 비판에도 불구하고 이 절을 재판에 삽입한 그의 진정한 의도는 오랜 초월철학의 전통 안에 자신의 초월철학을 새롭게 위치지우려는 데 있었다고 보인다.  

칸트가 『비판』기에 이르기까지 그리고 『비판』 이후에 수행한 여러 반성의 단편들은 그가 이들 개념들에 얼마나 사로잡혀 있는지를 잘 보여주고 있다. 에얼트만(B. Erdmann)의 해석에 따르면, 칸트는 범주표를 이들 초월자 개념에 기초지우려 했다. 비판철학의 구상에 착수했음을 표명한 1772년 후에는 물론 그 이전부터 칸트는 자신의 철학 체계 구성의 핵심 원리인 범주들을 연역하고자 시도했다는 사실을 여러 반성의 단편들이 보여주고 있다. 그런데 중요한 사실은 경험에 의존한 아리스토텔레스와 달리 “일정한 원리들”(B109)로부터 필연적이고 “완전한” 범주표를 완성했다고 자부했을 때, 범주의 형이상학적 연역의 준거가 된 원리가 바로 스콜라철학에서 유래된 초월자들이었다는 점이다. 이미 칸트는 바움가르텐(A. G. Baumgarten)의 『형이상학』 §72~77, 89~93, 94~100절에 대한 해석으로 간주되는 전비판기의 반성 R. 4766 속에서는 통일(Einheit), 진리(Wahrheit), 완전성(Vollkommenheit)의 초월적 술어들을 각각 관계, 질(Qualität), 양(Quantität)의 범주와 연결시켜 해석하려 시도했다.

“통일(결합, 일치Zusammenstimmung), 진리(질), 완전성(양)”(R. 4766)

칸트는 또한 3가지 초월적 개념들을 3중의 통일 개념으로 환원시켜 해석하고자 시도하기도 했다. 이때 이들 개념들은 논리적인 반성 속에서 한 개념의 통일을 이루는 3 계기들과 연관된다. 즉 한 개념의 통일을 이루는 개념의 본질, 이로부터 파생될 수 있는 다양한 속성들로서 부가어들, 끝으로 한 개념의 본질과 부가적인 속성들의 완전한 매거로서 두 계기의 통일로서 이해되고 있다.

“초월적 통일(transzendentale Einheit): 한 개념으로부터 다양의 도출. 본질(Wesen). 초월적 진리(transzendentale Wahrheit): 다양한 것들 서로간의 도출. 부가어(attribute). 초월적 완전성(transzendentale Vollkommenheit): 다양으로부터 개념의 도출. 여기서 통일은 형용사적(adiective)으로, 다시말해 형식적으로(formaliter) 이해되며, 한 대상의 개념으로서가 아니라 지성개념 일반의 가능성과의 일치로서 이해된다. 연관과 형식적 통일의 이런 3중의 방식은 범주들(Kategorien) 아래 속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범주들에 의한 지성의 통일(Verstandeseinheit)에 속한다.”(R. 4806)

여기서 ‘초월적 통일’은 양의 범주의 하나인 ‘단일성’으로 이해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범주적 통일의 근거가 되는 ‘통각의 근원적 통일’ 활동과의 연관성이 주목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비판적 사고가 형성되는 과정 속에서 점차 초월자 개념들은 인식능력과의 연관 속에서, 또한 양태 범주와의 연관 속에서 해석되고 있다.

“통일, 진리, 완전성(초월적 완전성)은 지성(Verstand), 판단력(Urteilskraft) 및 이성(Vernunft)의 관점에서 본 모든 인식들의 요구조건이다. 모든 것은 하나로부터(aus Einem) 이끌어 내어진다. 모든 것은 하나 속에(in Einem) 결합된다. 하나는 모든 것으로부터(aus allem) 이끌어내어 진다. 주어의 통일, 근거의 통일, 전체의 통일. 가능성(Möglichkeit), 현실성(Wirklichkeit), 필연성(Notwendigkeit) 이는 사물 일반의 가능성의 3 초월적 기준들이다. 3중의 형식적 통일.”(R. 5734)

칸트는 개념의 통일을 ‘지성’에, 개념의 진리, 즉 한 개념으로부터 도출되는 다양한 참된 술어[징표]들을 ‘판단력’에, 개념의 완전성, 즉 한 개념과 그 다양한 징표들의 완전한 일치를 ‘이성’에 의해 성립하는 것으로 해명함으로써, 종래의 통일, 진리, 완전성같은 초월자 개념들을 각각 상위 인식능력인 지성, 판단력, 이성에 할당한다.(cf. R. 4807) 이는 초월적 반성 속에서 수행된 종래 초월자이론에 대한 보다 적극적인 해석의 시도라고 볼 수 있다. 그리고 이런 일련의 반성들을 통해 칸트가 자신의 범주표를 작성하기 위해, 또한 인식능력을 지성, 판단력, 이성으로 구분하는 자신의 고유한 인식론을 발전시키는 데 있어 종래 초월자 개념들에 대해 면밀히 고찰했고 또 범주의 발견은 물론 자신의 인식론의 체계화를 위한 주도적인 반성의 원리로 사용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런데 R. 5562에서는 3개념들을 모두 모순율, 근거율과 같은 논리학의 원리들 및 판단의 종류를 3분하는 것과 연관지우고 있다.

“사물 일반의 가능성의 3개념들; 통일, 진리 및 완전성은 모든 판단의 3 형식적인 원칙과 관계된다; 모     순의 원칙, 충분 근거율, 모든 가능한 술어와 관련해 근거의 규정가능성의 원칙.(정언, 가언, 선언판      단)”

그리고 비판기 이후로 갈수록 초월자 개념들은 점차 그 성격과 기능이 논리적인 것으로 바뀐다. 비판기 이후의 반성으로 간주되는 반성 R. 5740, R. 5743, R. 6386 등은 『순수이성비판』 재판(1787)의 §12절에 기술된 생각을 반영하고 있다. 이런 비판기 및 비판 이후의 생각들은 에얼트만(B. Erdmann)에 의하면, 전통적인 존재론을 초월적 분석론으로 변형시키고자 하는 시도와 연관된다. 이는 또한 볼프와 바움가르텐에 의해 한갓 논리적으로 해석된 초월자이론에 대한 비판적 입장을 반영하고 있는 것이다. 당시 강단 스콜라철학에 의해 독단적으로 이해된 통일, 진리, 완전성이라는 초월적 개념들을 칸트는 『비판』에서 한갓 지성적인 사고 내지 “개념의 논리적 조건”으로서 간주되야 한다고 비판적으로 평가한다.

범주표의 주석에서 칸트가 “사물 자체의 통일성에 관한 형이상학적 이론”에 대해 “개념의 통일성 이론”을 대립시키고 한갓 “논리적인 기준”으로 해석하여 이렇듯 “옛 초월자이론의 의미를 개념론적 반성으로 환원시킬 수 있다”고 본 주된 이유는 “당시 독일 강단 형이상학의 한갓 논리적인 이해를 시야에 두어야만 이해될 수 있다.” 바움가르텐의 『형이상학』에서 ‘일자’(통일 unum) 개념의 의미는 한 사물에서 개념적으로 파악될 수 있는 규정들(begrifflich erfaßbare Bestimmungen), 즉 개념의 분석적 징표들의 다수를 자기 안에 통일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칸트의 용어로 이해하면, 한갓 개념의 “분석적 통일”을 의미한다. 또 강단 형이상학에서 각 사물은 참된 판단의 원천인 진리를 소유한다. 그러나 이런 생각의 배후에는 독단적 이성주의가 전제되고 있다. 즉 한 사물의 완전한 개념이 전지한 지성에게 알려져 있는 한, 사물에 관한 모든 참된 판단은 궁극적으로 분석판단이라는 라이프니츠식의 도그마가 전제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진리의 초월적 규정의 담지자는 고유하게 ‘사물’이 아니라 사물의 ‘개념’에 불과하며, 이런 개념에 내포된 징표들의 분해에 의해 참인 다수의 술어들이 도출된다고 가정되고 있을 뿐이다. 칸트가 『비판』에서 “주어진 개념으로부터 참인 귀결이 많을수록 개념의 보다 많은 객관적 실재성의 표시가 된다.”(B114)고 말할 때, 여기서 말하는 “객관적 실재성” 내지 “징표들의 질적 다수성”이란 단지 개념에 의해 표상된 사태내용성, 즉 데카르트 식의 한갓 “표상적 실재성”(realitas objectiva)을 의미하며, 개념으로부터 도출되는 “참인 귀결”이란 한 개념의 분해를 통해 이끌어 내어지는 술어들을 의미한다. 그리고 이런 술어들의 완전한 열거가 바로 개념의 명료성을 보증하며, 한 개념의 “완전성”을 이룬다. 따라서 참인 술어들이 사물로부터 도출되는 것이 아니라 한 개념으로부터 도출되는 한, 칸트에 의하면 이런 진리[통일, 완전성]란 단지 개념적 사고의 규준이외 다름 아니다. 즉 칸트가 보기에 종래 합리론자들이 시도했던 이런 식의 사물이해는 독단적인 존재론이며, 실질적인 대상에 대한 종합적 인식, 즉 한 사물에 대한 종합적 규정이라고 볼 수 없는 것이다. 이런 반성이 칸트로 하여금 『비판』에서 의식의 “분석적 통일”과 “종합적 통일”의 구별에로 나아가게 되는 배후근거를 이루고 있는 것이다.

중세의 초월자이론은 스페인의 예수회 소속 신학자였던 프란시스 수아레즈(F. Suarez; 1548~1617)를 거쳐 ‘사물’과 ‘어떤 것’이란 개념이 배제되고 ‘통일성’, ‘진리’, ‘선’의 3 술어로 제한되게 되며, 자신의 해석이 수아레즈의 견해와 전적으로 일치한다고 오해한 볼프(Chr. Wolff)에 의해 수아레즈의 입장이 “인식하는 정신으로부터 독립하여” 사물의 진리는 인간 정신에는 물론 신의 정신에 관계함이 없이도 사물에 귀속되어 있다고 잘못 해석됨으로써, 17세기 독일 강단철학에서는 옛 초월자이론이 신적 정신과의 본질적 연관으로부터 점차 분리되기 시작하고 한갓 사물의 자기동일성을 뜻하는 공허한 이론으로 전락하게 된다. 즉 당시의 철학사전에는 초월적 진리가 “사물의 신적 정신과의, 그리고 그 자신의 본질과의 동형성”으로 정의되어 있으나 볼프는 전통적으로 신적 정신과의 연관을 함축하는 이 정의의 전반부를 은폐함으로써 후반부만이 남게 되었고, 볼프는 이 잔여 부분 마저 사물과의 실재적인 연관을 사상한 채 단지 논리적으로 사고가능한 개념의 통일성으로 해석하고 있는 데, 이렇듯 한갓 논리적으로 오해된 초월자이론을 칸트가 무용하고 동어반복적인 것이라고 비판한 것은 전적으로 정당하다고 볼 수 있다.

또한 볼프와 바움가르텐에 있어서는, 스콜라철학자들이 구별했던 범주와 초월적 술어의 구분이 모호하게 되어 “범주론과 초월자이론의 옛 스콜라철학적 분리는 다시금 폐기되고 있다.” 칸트가 올바로 지적했듯이 이런 초월적 술어들은 “범주로 간주될 수 없는 것”(B113)임에도 불구하고 볼프의 존재론 속에서는 순수지성개념인 범주들과 뒤섞여 있는 것이다. 그러나 칸트가 자신의 “초월철학의 정점”으로 간주한 자의식의 “초월적 통일”(transzendentale Einheit)(A108, 118; B132, 139, 142, 195, 197, 220)을 “단일성 범주와도 구별하여” “모든 결합의 개념에 선험적으로 앞서며”“지성의 논리적사용에 있어 지성의 가능근거를 포함하는” “보다 높은” “질적 통일”(B131)로 규정할 때, 또한 칸트가 “오랫동안 보존되어 온 사상은 그것이 아무리 공허한 것처럼 여겨진다 하더라도 그 근원을 연구해 볼 가치가 있는 것”(B113)이라고 하면서 옛 초월자이론의 중요성을 인정할 때, 그는 오히려 볼프이전의 “전통적인 초월자이론(Transzendentalienlehre)과 자신의 초월철학(Transzendentalphilosophie)의 핵심 사이에 밀접한 연관을 스스로 설정”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칸트에 있어 통각의 “초월적 통일”은 모든 범주적인 대상 규정을 가능케하는 조건으로서 “초월적 주관”(das transzendentale Subjekt)이라 불려지는 바, “근원적으로 반성하는 어떤 것”(etwas grundsätzlich Überlegenes)으로 전제되는 한, 종래의 “스콜라적인 초월적인 일자 개념과 [내면적인] 친화성을 보유하고 있다”는 해석이 가능하다. 왜냐하면 “칸트에 의해 수행된 하나[통일], 진리, 선을 규정하는 의식(Bewußtsein)에로 연관지움은 이미 토마스 아퀴나스에 의해 선취”되어 있다고 볼 수 있고, 토마스에서도 “존재(ens)와 교환가능한 초월자들은 범주에 선행하는 것으로 간주되기 때문이다.”

이렇듯 옛 초월철학과 칸트 초월철학의 연관성은 “판단표로부터 범주를 도출해 내는 데 필요로 했던 칸트의 주요 원리가 종합(Synthesis)의 기능으로 소급되며, 이는 옛 스콜라적 이론에 있어 초월적인 일자의 체계적으로 통일하는 기능을 수용한 것”이란 점에서 찾아질 수도 있다. 따라서 옛 초월철학의 “초월적인 일자(unum transcendens)와 [칸트 초월철학에서] 초월적인 종합(transzendentale Synthesis) [내지 통일(Einheit)] 사이에는 직접적인 상응(direkte Entsprechungen)이 성립한다.” 이런 칸트의 코페르니쿠스적 전회를 통해 종래 초월자들은 다시금 존재론적인 타당성을 획득하게 된다고 보여진다. 막스 분트는 칸트가 비판에서 설정한 최초의 목표인 형이상학의 정초와 칸트가 최종적으로 수행한 결과를 다음과 같이 평가한다.  

“칸트가 스스로 설정한 목표, 형이상학의 새로운 정초는 그 수행 과정에서 변화된다. 그리하여 종착점에서 도달하게 된 것은 [초경험적인 것의 인식을 시도했던 낡은] 형이상학의 새로운 정초가 아니라 오히려 [경험의 형이상학이라는] 새로운 형이상학의 정초의 획득이다. 옛 형이상학을 근본적으로 새롭게 정초하는 일이 결국 그 자체 새로운 형이상학으로서 입증되게 된다.”

즉 초월자이론으로 대변되는 중세 스콜라철학의 전통이 형이상학을 새롭게 정초하고자 하는 칸트의 초월적 반성 수행 속에서 경험의 형이상학으로 변용됨으로써 경험 가능성의 원리를 체계화하는 새로운 존재론의 반성 원리로서 새로운 의미를 획득하게 된다고 보인다.

필자는 이제 스콜라적 초월자이론과 칸트 초월철학의 내적 연관성에 대한 보다 체계적인 연구를 앞으로 수행되야 할 과제로 남겨 두고자 한다. 모든 존재자 일반에 타당한 초범주적 술어들을 다루는 초월자이론과 칸트 사유의 연관성에 대한 연구는 칸트 철학의 형성과정에 대한 역사적이고도 체계적 해명에 기여할 뿐만 아니라 범주론의 체계화와 그 타당성에 대해 관심을 갖는 오늘날의 새로운 존재론의 모색에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보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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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콜라철학(Scholasticism)


중세 유럽의 그리스도교 사상가들의 철학체계.

종교 교리의 근원을 찾고 신앙과 이성, 의지와 지성, 실재론과 유명론, 신 존재의 증명과 같은 철학문제를 해결하려고 했다. 르네상스에서 19세기초까지 스콜라 철학이나 중세라는 말은 경멸과 비난의 표현으로 쓰였다. 중세는 고대 그리스·로마 시대와 근대 사이의 하찮은 막간극으로 여겨졌으며, 스콜라 철학은 단순히 교훈적 방법을 사용하여 전통적 가르침을 고수하고 쓸모없는 현학적 논의만 일삼는 철학으로 치부되었다. 그러나 오늘날의 학자들은 이 시기가 진정한 철학전통을 이어받았을 뿐만 아니라 고대와 근대에 견줄 수 있는 중요한 철학자들을 배출했다는 점을 어느 정도 인정하고 있다.


본질과 중요성

스콜라 철학은 아주 다양한 현상이어서 간단히 정의하기 어렵지만, 대체로 중세 유럽에 ' 그리스도교 학교'에서 가르친 철학으로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이 정의는 당시 미개인들이 '스콜라'(라틴어로 '학교'라는 뜻)를 필요로 하게 된 역사적 배경을 통해서만 올바로 이해될 수 있다. 북쪽에서 고대세계로 침입해온 이른바 미개 민족들은 대개 그리스도교도가 되었고 자기들이 발견한 새로운 전통을 습득하려고 했다 (→ 색인 : 야만인). 교부신학, 그리스 철학, 로마인의 정치적 지혜 등이 바로 그런 전통이었다. 그래서 중세철학이 최초에 당면했던 과제는 풍부한 전통을 배우고 획득·보존하는 것이었다. 이런 점에서 스콜라 철학은 무엇보다도 전례 없는 학습과정이었고 수백 년 동안 계속된 문자 그대로 광범한 '학교' 작업이었다.

스콜라 철학의 발전과정을 보면 처음에는 기존의 자료를 단순히 모으고 분류하고 배열하는 데서 출발하여 원문과 문제를 체계적으로 논의하는 단계를 거쳐 마침내 획득 가능한 진리 전체에 관한 포괄적 견해(Summa)를 제시하게 된다 (→ 색인 : 숨마). 그러나 중세 후기에 오면 기존의 지식을 탐구하고 논의하는 절차는 광범위하게 제도화되고 고정되어 새로운 문제에 대처할 수 없게 된다. 새로운 문제에 대한 해답은 직접 경험에서만 구할 수 있었다. 그리하여 14세기에는 스콜라 철학이 해체되기 시작했다.



역사와 쟁점

스콜라 철학의 근원

스콜라 철학의 역사를 크게 3단계로 나누면 '초기 스콜라 철학'(800~1200경), '전성기 스콜라 철학'(1150~1300경), '후기 스콜라 철학'(1300~1400경)으로 볼 수 있다. 또 스콜라 철학이 본격적으로 시작되기 전에 고대와 중세의 다리 구실을 하며 스콜라 철학의 기초를 놓은 인물로는 보이티우스와 위(僞)디오니시우스를 들 수 있다.

스콜라 철학의 가장 중요한 특징은 모든 철학의 목표인 '획득 가능한 진리 전체'에 그리스도교 신앙의 가르침을 포함시키는 것이었다. 이런 생각을 가장 분명하게 표명한 인물이 바로 6세기초의 학자 보에티우스였다. 그는 "할 수 있는 한 신앙을 이성에 결합하라"고 요구하고 독특한 방식으로 이 요구를 실행했다. 이를테면 그의 〈신성한 저작집 Opuscula sacra〉은 거의 신학적인 주제만을 다루지만 성서 인용은 단 한 군데도 없고 논리와 분석만 있다. 보에티우스가 선포한 신앙과 이성의 결합원리, 그리고 그 자신이 이 원리를 실행한 방식은 인간의 자연적 이성 능력에 대한 깊은 확신에 기초하고 있었다. 이런 확신은 인간이성의 이해능력을 넘어서는 것은 계시의 신비까지를 포함하여 아무 것도 없다는 합리주의적 신념으로 이어질 수 있었고, 실제로 스콜라 철학의 역사에서 이런 경향이 되풀이해서 나타나기도 했다.

다른 한편 합리주의의 위험을 일정한 한계 내에 묶어두려는 경향이 스콜라 철학이 출발할 때부터 있었다. 이른바 위디오니시오스의 ' 부정(否定) 신학'이 바로 이 경향이었다. 이 인물의 진짜 이름이 무엇인지는 알려져 있지 않으나, 대부분의 역사가는 그가 시리아의 신플라톤주의자로서 보에티우스와 같은 시대의 인물이었으리라고 보고 있다. 그의 저술은 1,000년 이상이나 큰 영향력을 행사했고 거의 성서만큼이나 존경을 받았다. 그의 영향력 덕분에 부정신학 또는 철학은 합리주의를 제한하는 평형추가 될 수 있었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신 자신이 계시하지 않는 한 어떤 이름도 신에게 줄 수 없다. 그러나 계시된 이름마저도 인간의 유한한 오성이 이해할 수 있는 것에 지나지 않으므로 신의 본성에 이르거나 그것을 표현할 수 없다. 따라서 신에 관한 모든 긍정적 진술은 부정이라는 교정수단을 필요로 한다. 신학자는 신을 '실재' 또는 '존재'라고 부를 수도 없다. 왜냐하면 이런 개념들은 신이 실재를 부여해준 사물들에서 이끌어낸 것이기 때문이다. 창조자는 그가 창조한 것과 같은 본성을 가질 수 없다. 부정마저도 상대적이다. 왜냐하면 신은 부정적이든 긍정적이든 인간이 그에 관해 말할 수 있는 어떤 것도 초월하기 때문이다.


초기 스콜라 철학

위디오니시오스의 영향을 받지 않은 초기 스콜라 철학의 주요 대표자로는 캔터베리의 성(聖) 안셀무스가 있다. 그의 사상은 위디오니시오스의 부정신학에 영향을 받지 않고, 그리스도교 신앙으로도 조명할 수 있는 인간 이성의 무한한 능력을 신뢰함으로써 일종의 합리주의에 도달했다. 물론 "이해받기를 원하는 신앙"이나 "이해하기 위해서 믿는다"는 그의 유명한 글귀는 계시의 신비가 모든 추론의 기초가 된다는 믿음을 표명한다. 그러나 안셀무스에서 이성과 신앙의 결합은 이론적인 것이라기보다 종교적인 것이어서 붕괴될 위험을 안고 있었다.

사실 스콜라 철학 내부에서 이성을 강조하는 관점과 신앙의 초이성적 순수성을 강조하는 관점 사이에는 끊임없는 논쟁이 있었다. 12세기 클레르보의 베르나르와 피에르 아벨라르 사이의 논쟁은 그 대표적 예이다. 베르나르는 무엇보다도 종교적 실천가이자 신비적 명상가였다. 그는 윈리적으로는 철학을 거부하지 않았지만 아벨라르가 주로 논리적으로 신학에 접근하는 것을 의심의 눈초리로 바라보았다. 그는 "아벨라르는 인간 이성으로 신을 모조리 이해할 수 있다고 믿는다"고 비난했다.

당시 논리학은 논쟁의 주요싸움터였다. 아벨라르는 논리학을 현대와 비슷하게 "언어적 표현에 기초하여 사유를 비판적으로 분석하는 것"으로 이해하고 이런 언어논리학의 관점에서 이른바 '보편문제'를 날카롭게 논의했다 (→ 색인 : 보편자). 보편문제란 다음과 같은 것이다. 이를테면 '소크라테스'라는 고유명사뿐 아니라 '인간'과 같은 보통명사를 나타내는 외적·객관적 실체가 있는가? 아니면 공통개념(보편)은 주관적 사유의 실재 또는 말소리의 실재만을 가질 뿐인가? 이 보편문제가 중세 스콜라 철학의 주요한 또는 유일한 관심사였다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이다. 스콜라 철학의 주요관심사는 처음부터 실재 및 존재 전체였다.


전성기 스콜라 철학

초기 스콜라 철학은 전체적으로 아우구스티누스와 플라톤의 사상을 바탕으로 체계화하고 제도화하는 추세에 있었다. 이때, 그때까지 알려지지 않았던 아리스토텔레스의 주요저작들이 라틴어로 번역되면서 전통적 체계에 대항한 새로운 강력한 체계로서 '전성기 스콜라 철학'이 시작되었다.

아리스토텔레스 저술 번역은 그리스어본을 옮긴 것이 아니고 아랍어 번역을 중역한 것이었으며 그의 저술과 함께 아랍 주석가들의 저작도 유입되었다. 가장 중요한 주석가로는 페르시아 출신의 11세기 철학자 이븐 시나, 스페인 출신의 12세기 철학자 아베로에스, 12세기 정통 유대인 철학자 모제스 마이모니데스를 들 수 있다.

새로 등장한 아리스토텔레스주의의 도전을 대담하게 받아들인 중세 최초의 신학자는 13세기 도미니쿠스 수도회 수사 알베르투스 마그누스였다. 그는 단지 책상물림의 학자가 아니라 직접 자연을 관찰하고 실험했다. 그는 "구체적 사물에 관한 철학은 있을 수 없다"라든가 "그런 문제에서는 경험만이 확실성을 준다"와 같은 완전히 새로운 방법론적 원리를 내세웠다. 알베르투스에서 이성은 새로운 의미를 얻는다. 이성은 형식상으로 올바르게 사고하는 능력일 뿐 아니라 실재를 파악하는 능력이기도 하다. 이리하여 "신앙과 이성의 결합"이라는 보에티우스의 원리는 신앙을 인간과 우주에 관한 늘어나는 자연적 지식과 끊임없이 통합해야 하는 어려운 과제를 안게 된다.

이 모든 새롭고 다양한 요소들을 하나의 일관된 구조로 통합하려고 한 사람이 알베르투스의 제자 토마스 아퀴나스였다. 아퀴나스의 필생의 과업은 성서와 아리스토텔레스를 결합하는 것이었다. 아퀴나스에게 '아리스토텔레스'란 인간의 신체와 인식능력을 포함하여 자연적 실재 전체를 긍정하는 특수한 세계관을 뜻했다. 〈신학대전 Summa theologiae〉은 이런 종합의 산물로서 거대한 지적 구조물이지만 결코 한정된 지식의 닫힌 체계를 의도한 것은 아니었다. 그는 그리스도교 신앙이 자연적 이성과 완전 일치한다는 안셀무스의 주장에는 동조하지 않았다. 그동안 성서적 충동과 철학적·세속적 충동이라는 논쟁의 양극은 확연히 분리되었고 양극 모두 아퀴나스에게서 전거를 찾을 수 있었다. 아퀴나스는 파리에서 "신학적으로 기초된 세속성과 세계에 개방된 신학"이라는 자신의 관점을 시제르 드 브라방의 철학적 세속주의뿐만 아니라 이탈리아 신학자 보나벤투라의 전통적 아우구스티누스주의에 맞서서도 옹호해야 했다. 보나벤투라는 아퀴나스가 모든 자연 사물의 권리를 옹호함으로써 신의 권리를 침해했으며, 신학자는 신학주제에 관련된 창조 부분만 알 필요가 있다고 주장했다. 이에 대해 아퀴나스는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신학자가 자연 사물을 탐구하는 데서 얻는 이익은 미리 규정될 수 없지만, 일반적으로 신앙은 세계에 대한 지식을 전제하고 필요로 한다. 창조에 관한 오해가 사람들을 신앙의 진리에서도 벗어나게 할 수 있다." 이런 대답은 낙관적 합리주의처럼 들리지만 아퀴나스는 늘 부정신학의 교정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 그에 따르면 인간은 신이 무엇인지를 모를 뿐 아니라 사물의 본질도 모른다.


후기 스콜라 철학

아퀴나스는 신앙과 이성의 틈을 메우는 데 실패했다. 14세기 후기 스콜라 철학에서는 신앙과 이성의 결합이 부정된다. 위디오니시오스의 부정신학은 이성의 과잉에 맞서기에는 부족했다. 왜냐하면 이성은 필연성의 관념을 함축하는 듯이 보였기 때문이다. 둔스 스코투스는 '자유'의 이름으로 2번째 교정을 가했다. 그는 자유를 주로 신과 관련시켰다. 구제·은총·창조 등은 신의 절대적 자유의 작업이므로 어떤 것에도 '필연적 이유'란 있을 수 없다. 따라서 신앙과 사변적 이성을 통합하려는 시도는 쓸데없는 짓이다. 여기서 한걸음 더 나아간 것이 오컴의 '이중진리설'이다. 오컴에 의하면, 개별 사실들만이 '실재적'이고 그것들의 정합성은 실재하지 않는다. 이 단순한 사실은 계산하거나 연역할 수 없고 경험할 수 있을 뿐이다. 이성이란 구체적 실재를 만날 수 있는 능력에 불과하다. 오컴의 이런 토양에서는 오직 '긍정' 신학만 가능하다. 사변적 이성과의 협력은 비신학적인 것으로 거부된다. 신앙과 지식은 완전히 다르고 둘의 결합은 가능하지도 바람직하지도 않다. 이로써 1,000년 이상 노력해온 이성과 신앙의 결합은 붕괴되었고 중세 스콜라 철학은 해체되기에 이르렀다.


지속적 특징

그러나 중세 스콜라 철학은 완전히 사라지지 않고 뒷날에도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다. 우선 데카르트·로크·스피노자·라이프니츠 등 근세 고전 철학자들이 스콜라 철학의 영향을 받았다. 나아가 스콜라 사상으로 되돌아가려는 2가지 주요운동이 있었다. 하나는 르네상스 스콜라 철학(바로크 스콜라 철학)이고 또 하나는 19, 20세기의 신스콜라 철학으로, 둘 다 주로 아퀴나스의 저작에 관심을 가졌다.

르네상스 스콜라 철학은 16세기 종교개혁에 자극을 받아 생겨난 것으로 대표자는 톰마소 데 비오(또는 카예타누스), 프란시스코 데 비토리아, 프란시스코 수아레스 등이었다. 이들은 반종교개혁법에 깊이 관여하는 동시에 자기 시대의 문제, 즉 국제법, 식민주의, 부당한 정부에 대한 저항, 세계 공동체 등의 문제에 관심을 가졌다. 그러나 르네상스 스콜라 철학은 계몽주의 철학과 독일 관념론에 의해 소멸했고 이에 대응해서 19세기에 신스콜라 철학이 발생했다. 주요대표자는 독일의 예수회원 요제프 클로이트겐으로서 "토마스에 따른 그리스도교 철학의 부흥"을 내세웠다. 그결과 연구소와 대학 등지에서 스콜라 철학연구가 활발했으나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실존주의와 마르크스주의의 영향으로 쇠퇴해갔다.

J f. Pieper 글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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