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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한국의 경제 성장에 대한 단상 (2010년 2월 9일)

서까래 2010. 3. 28. 21:57

미국 대통령 오바마는 어느 연설에서 한국이 미국인들의 희생으로 하여 번영을 누리고 있다, 고 언급하였다. 이 발언은 아프카니스탄에 더 많은 군인들을 보내는 일에 대하여 국제적 호응을 이끌어내기 위한 정치적 수사의 일환이었다. 그의 입장을 노골적으로 말한다면, 한국 전쟁에 미국이 개입하지 않았다면 한국은 공산화되었을 것이고 현재 북한 내지는 베트남 정도의 수준에 머물렀을 것이라는 평가이다.

우리는 한국 전쟁에서 미국인들이 감수한 희생을 모른 척할 수 없다. 그러나 미국은 지난 60년간 매우 많은 나라들에 개입하였다. 남미 여러 나라들이 미국의 개입을 통하여 번영을 누리고 있는 지는 상당히 의문스럽다.

한국이 1950년을 기점으로 하여 60년만에 – 두 세대 – ‘기적적인’ 경제 성장을 이룰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인가? 이것은 박정희에서 전두환이 집권한 시대에 이르기까지 크게 유행했던 사회학적 주제였다. 한국의 경제적 성장은 한국과 미국의 관계 보다는 더 넓은 틀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1970년대 이후 자국의 실리를 강조하는 새로운 흐름이 전세계를 강타하면서 냉전 체계가 깨어질 조짐을 보였다고 한다. 나는 1980년대에 고등학교를 다닐 때 그런 내용을 배웠다. 미국이 베트남에서의 철군하고 대만과 단교하면서 중국과 수교한 일이 이를 웅변적으로 보여준다고 하였다. 현대에서 마키아벨리적 정치인의 상징이 된 닉슨의 업적으로 간주되는 것들이다.

어떤 각도에서 보면, 미국인들이 아무런 ‘경제적’ 이익 없이 한국전에 참전하여 엄청난 희생을 치른 것으로 보이기도 한다. 그렇지만 1950년의 상황으로 돌아가 보자. 냉전 체계라고는 하지만 이는 미국과 소련을 정점으로 하는 양자구도의 체계라고 할 수 있다. 당시 미국인들은 전 세계라는 축구장에서 소련과 미국이 수퍼볼을 놓고 격돌하고 있다는 상상력을 하고 있지 않았는가, 가정해 본다.

 

그런데 과거 미국이 치른 무수한 전쟁들에서 미국인들은 아무런 이득도 얻지 못하고서 희생을 했다고 믿을 수는 없다. 1950년을 전후하여 미국인들이 한국이나 다른 많은 나라들에 개입한 것은 어떤 면에서 미국인들이 가지고 있던 나르시시즘에 근거하여 가능한 것이었다. 우리는 그들의 나르시시즘을 충족시켜주는 대가로 – 문득 헤겔의 노예와 주인의 변증법이 연상된다 – 경제적 이득을 취했다.

이를 통하여 미국도 궁극에는 경제적 이득을 취했다는 고전적인 제국주의론 내지는 고전적인 식민주의 이론이 있을 수 있다. 오직 경제적 교환에만 관심을 집중할 때, 모든 것들이 착취하는 사회가 피착취하는 사회를 경제적으로 쥐어짜기 위한 직접적이거나 간접적인 수단이 된다. 이는 고전적 식민지 쟁탈의 시대에 매우 적합한 이론이다. 일본은 한국에 대해서 이런 모형을 취했다. 그렇지만 어느 순간에 지배와 착취의 문제는 이런 차원을 약간 벗어나는 면이 있다. 물론 알튀세르가 말했듯이 ‘최종 심급에서’ 경제가 결정할 것이다. 또는 모택통의 말의 빌면 ‘최종 심급에서’ 폭력이 결정할 것이다.

그렇지만 신식민주의 내지는 포스트식민주의라는 말이 의미가 있다면, 그것은 착취와 피착취의 구조가 단순히 필요의 차원에 머물지 않고서 욕망의 차원을 포함한다는 사실과 관련이 있다. 사람들은 경제적 동기들만으로 살지 않는다. 현재 어느 사회에서나 성행하고 있는 온갖 형태의 오락들을 보라. 책을 읽으면 밥먹여 주지 않듯이 영화보고 골프를 치고 스키를 탄다고 하여 밥벅여 주지 않는다. 오히려 그런 활동들은 우리가 가지고 있는 소소한 자원들을 급속하게 고갈시킨다. 그런데 소위 합리적인 경제인들로 불리는 사람들은 왜 그런 쓸데없는 짓을 하는가? 개인의 삶이 경제적 동기에 의해 절대적으로 지배되는 것이 아니라면, 이런 개인들의 집단적 활동이 경제적 동기에 의해 절대적으로 지배된다고 믿을 근거는 거의 없다. 오히려 현대의 신자유주의 또는 넓은 의미에서 자본주의는 개인이 오직 경제적 동기에 의해서 지배된다는 가설을 정상화해야만 유지되는 경향이 있다.

서양에서18세기에서 19세기에 확고하게 정초된 어떤 사회 철학에 따르면, 인간은 경제적 동물이다. 이 점에서 스미스와 마르크스는 일치하는 것으로 보인다. 다른 모든 요소들을 경제적 요소를 둘러싸고 벌어지는 사람들 사이에서 과학이냐 이데올로기냐 하는 틀안에 놓이게 된다. 고전적인 경제이론들 – 좌우를 막론하고 – 의 이론적 수정은 인간이 경제적 동물이라고 할 때, ‘경제’라는 단어의 의미를 무한히 확장하면서 이루어진다.


이와 대비하여, 신학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 없었던 헤겔이나 부르조아 계급의 정서를 대변하는 베버나 프로이트 같은 이들이 경제를 넘어서서 인간을 지배하는 요소들에 관심을 가졌던 것은 당연한 일이다. 나는 분명 부르조아 근성을 버리지 못한 탓인지 이들의 이론에 더 솔깃함을 느낀다. 삶은 언제나 경제와 맞물려 있지만, 경제를 벗어나는 어떤 요소들에 의해서 결정적인 영향을 받는다.

이 시점에서 미국의 도움이라는 맥락을 벗어나서, 아시아에서 자본주의적 경제 발전의 요인은 무엇일까, 를 생각해 본다. 베버주의자인 미국 사회학자 R. 벨라는 아주 오래 전에 일본의 경제 발전을 설명하기 위하여 ‘유교’의 역할에 주목한 적이 있다. 베버는 개신교의 금욕주의와 자본주의의 정착을 연관시키면서 유교나 도교나 불교 등이 자본주의의 ‘자생적’ 발달에 불리하다고 평가한 바가 있다. 이런 나라들의 자본주의화 – 이미 베버의 시기에 일본의 성장은 괄목할만한 것이었다 – 는 전파의 논리를 통해 설명된다.

어떤 면에서 베버의 사회학은 마르크스에 대한 비판의 성격을 갖지만 보다 심층적인 역사들은 베버에 불리한 점이 많이 있다. 가령 개신교가 아니라 천주교에 지배되고 있던 나라들의 르네상스와 초창기 식민지 개척의 영향을 무시하는 경향이 있다. 가령, 스페인이나 포르투갈 같은 나라들의 아메리카 발견과 그 착취는 서양의 자본주의화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금욕과 탐욕의 오묘한 융합을 이루었던 근대 자본가들의 미심쩍은 정신이 자본주의의 발달에 남미의 금은과 감자보다 더 큰 역할을 하였던가? 여하튼 코페르니쿠스와 갈릴레오와 데카르트와 콜롬버스 등이 천주교인이었던 점은 어떤 역사적 가치를 가질까? 나는 천주교가 근대의 출발을 이룬다, 고 생각하지 않는다. 다만 서양사의 흐름을 보는 보다 장기적이고 복잡한 모델을 언급하고 싶다.

20세기를 전후하여 살았던 베버의 시각은 세계사적 규모를 갖지 않는다. 그가 전세계의 종교들과 법체계들과 정치체계들에 정통했다는 사실과 그의 역사관이 매우 국지적이라는 사실은 기묘한 일이다. 그에 비하여 마르크스는 진정한 의미에서 세계체계론자로 보인다. 세계는 연관되어 있고 세계의 한 부분의 부는 다른 부분의 가난과 착취에 근거하고 있다. 그보다 일찍 살다 죽은 스미스와 리카아도 같은 인물도 베버보다는 훨씬 국제적이다.

벨라는 베버의 시각 하나를 교정 내지는 완화하려고 한다. 그의 시각은 사실 옳은 바가 있는 데 소위 개신교가 지배적인 국가들의 자본주의화는 역사의 진공 상태에서 이루어지지 않는다. 오히려 개신교와 자본주의는 동시대에 출현하는 것으로 보인다. 베버주의적 사회학자들에게 일본의 경우는 매력적이다. 전통적인 사회에서 자본주의사회로 이행하는 데 성공했을 뿐만 아니라 서구의 영향은 매우 미미하였고 개신교는 거의 자취만 보이고 있을 따름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벨라가 제시한 ‘유교적 금욕주의’는 소위 베버적 ‘유교적 현세주의’보다 훨씬 강렬한 것이 아니었을까? 물론 내가 염두에 두고 있는 것은 유교가 갖는 초극의 합리주의이다. 실질적으로 자본주의의 성공은 매우 좁은 합리주의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 비판 이론의 용어로 ‘도구 이성’은 자본주의 발전의 기초를 형성한다.

베버의 개신교적 금욕주의와 저축과 재투자를 통한 자본의 본원적 축적의 이론은 그 자체가 마르크스에 대한 비판을 위해 고안된 것이다. 마르크스의 시대는 영국 자본주의의 정점을 이룬다. 따라서 마르크스의 분석들은 많은 경우에 영국 근대사이기도 하다. 그는 영국의 자본 축적이 (내적) 식민지의 착취와 (외적) 식민지의 착취에 의해 가능했다고 주장한다. 내적 식민지 착취의 과정은 르네상스인으로 분류되는 토마스 모어의 [유토피아]에서 그 자취를 드러낸다. 이 착취적 대지주들은 이윽고 합리적인 자본가로 변모할 것이다. 이 시기에서 식민지 쟁탈이 본격화되는 19세기까지 영국의 상황은 그렇게 평화로운 것이 아니었다. 맬더스의 [인구론]과 마르크스의 [자본]을 함께 읽어 보라.

영국과 다른 유럽 선진국들의 내적 식민 상태는 외적 식민 상태에 의해서 완화되었다. 물론 당시의 노동 운동이 얼마나 효과가 있었는가 하는 문제는 또 다른 논의를 요구한다. 이 경우에 우리는 러시아를 생각해 볼 수 있다. 노동자들의 요구가 받아들여지는 순간에 자본주의의 발전의 속도는 매우 더딜 수밖에 없다. 또는 마르크스가 예언했듯이 공황 등의 과정을 거쳐서 자체 붕괴의 과정을 겪을 것이다. 그런데 유럽의 자본주의의 발전은 이 한계를 식민지 개척을 통해서 (어느 정도) 해결하였다. 이 시점에서 소위 선진 국가의 복지국가 모델이 힘을 얻기 시작하였다. 자본주의하에서 복지국가의 모델은 오직 식민지의 착취를 전제로 하는 경우에 이해될 수 있다.

그러나 식민지는 무한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유럽 전체는 식민지의 저항에 부닥칠 수밖에 없으며 새로운 발전을 모색하였다. 이로 하여 제2차 세계대전 이후의 냉전 체계가 가동되기 시작하였다. 그렇지만 식민지 착취는 여전히 근절된 것이 아니라 매우 다양한 방식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전세계적 규모의 가난과 기아는 엄청난 수준이고, 기술 혁신과 연관된 환경 파괴는 돌이킬 수 없는 지경에 이르고 있는 상황이지 않는가?

이런 배경에서 한국을 생각해 본다. 내가 대학을 다니던 시절인 1980년대 말에서 최근까지 넓게 비판적이라고 불릴 수 있는 사회과학자들은 한국을 포스트식민주의와 관련하여 고찰했던 것 같다. 이 시각에서 한국은 소위 새로운 식민지로 규정된다. 종주국 내지는 중심인 미국이 온갖 수단을 사용하여 한국의 노동과 자본을 착취한다는 단순한 도식이 활용되었다. 이제는 과거보다도 훨씬 더 ‘비교우위론’ 같은 시각들이 힘을 얻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가령 FTA 논의 등에서 보이듯이 한국은 미국과 동등한 경쟁 파트너가 된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미국과 한국의 관계는 여전히 불평등한데도, 많은 한국 사람들은 미국을 착취할 수 있는 시장으로 간주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자본주의 내지는 신자유주의의 원칙에 따르면 한국이 미국에 대하여 이익을 취할 수 있는 방법들은 많지 않다.

한국의 경제 성장을 설명하는 데 있어서 단지 미국이라는 요소만이 있는 것은 아니다. 오늘날 육자 회담이라는 틀에서 명확히 보듯이 한국의 운명은 여전히 국제적 힘들의 각축에 의해서 결정된다. 다시 말하면 지난 60년간 한국의 사회사를 검토하는 데 있어서 이 힘들을 충분히 고려할 필요가 있다. 미국의 식민지라는 단일한 설명은 아주 단순한 것이다. 미국은 한국을 식민지적으로 착취하지 못할 여러 이유가 있었다. 경제적인 측면만 고려하여도, 미국이 아랍이나 남미와 갖는 관계와 미국의 아시아 정책은 다른 측면을 갖는다. 미국이라는 국가 전체가 아니라면 적어도 많은 미국 사람들을 장악하고 있던 어떤 심리적 요인들을 보기 위해서는 그들이 베트남에 대해 가진 강박을 고려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그들은 베트남에서 무엇을 얻고 무엇을 잃었는가?

한국은 미국의 입장에서 오직 지정학적 가치’만’을 갖고 있었다, 고 나는 배웠다. 그렇지만 미국이 원칙적으로 남한을 군사적으로 포기했을 때, 이미 그들은 지정학적 가치가 그렇게 높지 않다고 보았음에 틀림없다. 그러면 그들은 왜 늦게서야 한국전에 참전하게 되었을까? 미국이 한국전에 개입하도록 만든 것들은 무엇일까? 한두 가지 억측만 늘어 놓는다.

1950년을 전후하여 미국 사회에는 매카시즘이 강렬하게 몰아치고 있었다. 이를 계기로 헬렌 켈러나 존 스타인벡, 알버트 아인슈타인 등에 짙게 나타나는 사회주의가 미국에서 거의 자취를 감추기 시작하였다. 공산주의의 박멸이 생사를 건 사명이 되고 있었다. 이런 상황이 한국전에 참여할 것인가 하지 않을 것인가 하는 논의들이 미국에서 이루어졌다고 하자. 그 경우에 반공주의를 정치적 기반으로 하는 입장들은 어떤 선택을 할 것인가? 이런 선택들의 비합리성에 대해서는 미국이 일본에 원폭을 투하하는 결정적 결단을 내리는 과정을 생각해 볼 수 있다.

당시에 한국은 베트남과 더불어 미국에게 매우 큰 심리학적 가치를 가졌다. 지정학적 가치를 거론하자면 미국은 정치적으로 소련과 중국과 더불어 교섭을 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전세계의 자원 소모가 극도에 달하던 1953년에 미국과 중국과 소련은 극적으로 정전에 합의하였다. 진실로 지정학적 가치가 큰 경우라고 한다면 정말 그런 해결이 가능한 것이었을까? 그래도 미국의 개입이 한반도의 공산화를 막았던 것은 분명하다.

일단 다시 한반도가 분단되었을 때, 북한은 북한대로 한국은 한국대로 근대화의 과정을 서둘 수 있었다. 현재의 북한을 보면 참으로 비참한 나라로 보이지만 1980년 정도에는 두 체제는 비슷한 정도의 경제력을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당시 반공이 국시가 되었던 것은 이런 정황을 반영한다. 오늘날 북한에 대한 염려는 이데올로기적이 아니라 보다 현실적인 차원으로 옮아왔다.

한국의 자본주의에서 박정희와 그를 중심으로 모인 재벌들의 역할은 무엇이었나? 소위 개발독재의 효과는 무엇이었나? 나에게 이 문제는 당시 엘리트계급들이 한국민을 일정한 선을 넘어서 착취할 수 있었는가, 와 연관되어 있다. 이와 관련하여 남미와 아프리카의 여러 나라들을 비교해 볼 수 있다. 그리고 다소 낮은 수준에서 중동의 나라들과 비교할 수 있다.

한국은 자원의 차원에서 남미의 착취 모델이 가능한 나라가 아니다. 이는 일본이나 아시아 다른 나라의 경우도 그렇다. 다시 말하면, 중동이나 남미 등은 자원의 차원에서 선진국으로부터 막대한 자본을 끌어올 수 있는 구조를 갖는다. 다시 말하면, 이들 나라들은 국민들 전체를 무시하고 타락할 수 있는 조건을 갖추고 있다. 그들에게 있어서 부의 일차적 원천은 자연 자원이지 노동이 아니다. 따라서 그들은 (외국의) 군사력을 동원하여 자국민들으로부터 자연 자원을 확보하는 데 혈안이 된다. 따라서 그들은 노동의 장기적 착취를 통한 부의 축적 같은 것에 매력을 느낄 이유가 거의 없다.

그렇지만 한국의 경우에서 외국 원조라고 하는 매우 소극적인 ‘선물’을 제외하고서 엘리트 계급들이 부와 권력을 확보할 수 있는 방법은 노동 착취의 형태를 가질 수밖에 없으며, 노동 착취에는 일정한 한계가 있기 때문에, 단기가 아니라 오직 장기에 걸친 착취 구조를 가질 수밖에 없다. ‘황금알을 낳는 거위’의 우화는 한국 같은 나라 – 과거에 영국 같은 나라 - 에 어울린다.

한국의 엘리트계급은 이미 1960년에 오직 이 모델만이 가능하다는 것을 보았다, 고 가정해 보자. 엘리트의 입장에서 4.19혁명과 5.16쿠데타는 국민들이 참아낼 수 있는 착취 내지는 부패의 한계를 설정한다는 점에서 중요한 사건이다. 박정희와 그 주변 세력이 남미식 독재자들과 마찬가지로 노골적 경제적 착취를 할 수 있는 조건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았다. 부패의 마지노선같은 것이 이미 한국 사회의 내적 조건에 의하여 결정되어 있었다. 그렇다면 박정희 같은 인물이 시행한 정책들과는 다른 정책들을 취할 수 있는 가능성은 있었던가? 나는 당시 한국이 이룩한 엘리트들의 수준에 따르면 그럴 수 있는 가능성은 극히 없었다고 믿는 편이다. 엘리트 계급에 속하는 사람들이 자원이 없는 나라에서 부의 원천은 오직 노동밖에 없다는 것을 알았다는 것이 기적같은 일일 수는 없다.

박정희라는 개인이 아니라 한국의 엘리트 – 특히 재벌이 하나의 연구 단위일 수 있는데 – 에 초점을 맞추어 분석할 필요가 있다. 이들의 입장에서는 하나의 정치 형태를 구성하는 것이 요구되었다. 따라서 일본을 약간의 예외로 하고서 아시아 국가들이 갖는 공통점은 (1) 자원의 부재와, (2) 합리적으로 착취하는 엘리트 집단의 존재와, (3) 상당한 수준에 도달한 다수의 노동자들이었다.

한국의 경제 개발은 특정한 정치인들과 그들의 패거리의 차원이 아니라 엘리트와 대중, 또는 자본과 노동의 관계에서 고찰해야 한다. 이 자본을 매판 자본이니 식민 자본이니 하는 말로 표현할 수만은 없다. 그렇지만 이 자본이 외국의 도움에 기초하는 한에 있어서 매우 허약한 형태의 자본이라고 할 수 있다. 어쩌면 한국의 근대사는 자본과 노동의 차원이 아니라 노동과 노동의 차원에 놓이는 지도 모르겠다. 요컨대, 기생적 자본주의의 형태로 본원적 자본을 축적하지 못한 형태에서 나타나는 근대화 모델이라고 할 수 있다.

한국의 1960-1990년을 발전의 시기로 잡는다면 이는 정확히 개발 독재와 맞물린다. 따라서 피상적으로 한국의 상황에서 개발독재는 발전에 있어서 가장 효율적인 모델이라는 추론이 나올 수도 있다. 다시 말하면, 매우 윤리적이고 금욕적인 독재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그들은 독재를 했을망정 국민들을 부강하게 하였다, 고 말한다. 현재까지 맹위를 떨치고 있는 박정희에 대한 향수는 분명 이런 차원을 갖는다. 요컨대, 그는 매우 훌륭한 독재자이다. 박정희를 추앙하는 어떤 집단들이 다수 나올 수도 있겠다.

한국의 근대화는 한국의 엘리트 계급의 영리한 노동 착취에 기초하고 있다. 그들은 그들의 필요에 의하여, 박정희와 동일한 독재자들을 가질 수 있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박정희는 도대체 무엇을 했던가? 박정희 체제는 알튀세르의 모델에 가장 적합한 형태를 제공할 것이다. 하여간 요즘 나의 추측들의 수준에서 박정희를 과대하게 또는 과소로 평가할 필요는 없다. 아주 작은 규모의 국가라고 하여도, 일인의 정치가의 인격 수준에 따라 흔들릴 수 있다, 는 어떤 제왕적 상상력에서 벗어날 필요가 있다. 이에 대하여 마르크스적이든 심지어는 베버적이든 보다 체계론적인 시각을 가질 필요가 있다. 물론 프로이트는 여기서 중간 규모의 상상력 같은 것을 제공할 것이다.

(과거에) 한국에서 자본을 축적하려고 시도한 세력들은 마르크스적인 의미에서 노동의 착취 이상은 있기 힘들었다. 잔업과 야근 등을 포함하여 극단적으로 노동을 착취하는 온갖 형태들이 성행하였다. 물론 중국의 경우에서 보는 것처럼 착취당하는 사람들은 과거 또는 이웃과 비교함으로써 착취의 비인간적 강도를 참아낼 수 있다. 그리고 착취하는 사람들이 은혜를 베푸는 사람들로 여겨지기도 한다. 그리고 한국적 사회가 갖는 역동성에 따라서 자식의 세대에서 상향적 계급 이동이 가능하다는 점도 황폐한 삶을 견디게 만든다.


한국에서 분명 새로운 감수성의 태동을 알리는 사건은 1990년대 후반에 터진 경제위기일 것이다. 그 사건은 한국을 살아가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부지불식간에 느끼고 있던 불안들이 현실로 터져나왔다. 한국이라는 나라가 얼마나 불안정한 기초 위에 서 있는가, 를 여실히 보여주었다. 군부 독재의 슬로건을 그대로 이은 각종 문민 정부들은 실질적으로 선진국에 진입하였다고 대대적인 선전을 하던 시대라서 한국의 소시민들은 안심하고 있는 터였다. 그래 최소한 먹고 사는 문제는 이제 해결하였구나! 그런데 이 확신은 근거없다는 것이 매우 분명해졌다.

이 위기를 계기로, 한국 사회는 급속하게 보수화되기 시작하였다. 나는 이 보수화의 과정에서 김대중과 노무현이 대통령에 당선될 수 있었던 사실을 기이하게 여기고 있다. 그런데 그들의 개인적 성향과는 무관하게 그들이 몸담았던 정당과 그들의 정치적 기반들은 그의 정치적 반대 세력들에 비하여 비판적 정치 의식을 가진 것은 아니라는 생각을 요즘 들어 많이 하고 있다.

작년에 누군가가 김대중의 집권과 더불어 신자유주의의 팽창이 가속화되었다, 고 지적하였다. 김대중의 시대는 경제 위기의 시대였던 까닭에 신자유주의의 노선과 배치되는 분배와 정의 같은 가치들을 전면에 내세울 수 없는 상황이었다. 박정희는 말할 것도 없고 전두환도 다시 ‘구국의 영웅’으로 부활하는 시점이었다. 이런 때 김대중이 아무리 개인적으로는 진보적 성향을 가지고 있었다고 하더라도 현실 정치인의 한계를 노정할 수밖에 없었다. 이 점은 노무현의 집권에서 더욱 뚜렷하게 나타난다. 이라크 파병 같은 것을 통하여 한국에서 현실적 정치 세력들이 얼마나 허약할 수밖에 없는가, 를 보여주었다.

2010년의 시점에소 보면, 한국 사회의 보수화는 매우 뚜렷하다. 이명박 정부의 시책들이 일관되게 보수적 성향을 가짐에도 불구하고 시민들의 저항이나 비판은 극도로 약화된 것으로 보인다.

이 시절에 나는 미국으로 도피한 탓에, 2000년 이후에 한국 사람들이 어떻게 살고 있는 지를 체험으로 알지 못한다. 나의 십년은 공중으로 떠 버렸다. 그래서 이 글은 2000년까지 내가 살면서 느꼈던 것들을 담고 있다. 이미 낡을대로 낡았음에 분명하다. 이런 글을 올리는 것은 그 시절을 살아온 사람들의 비판을 통해서나마 나의 역사성을 다시 정초해보려는 시도이다. 

출처 : 비평고원(Critical Plateaux)
글쓴이 : 한살림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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