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설(暴雪)
-오탁번
삼동(三冬)에도 웬만해선 눈이 내리지 않는
남도(南道) 땅끝 외진 동네에
어느 해 겨울 엄청난 폭설이 내렸다
이장이 허둥지둥 마이크를 잡았다
― 주민 여러분! 삽 들고 회관 앞으로 모이쇼잉!
눈이 좆나게 내려부렸당께!
이튿날 아침 눈을 뜨니
간밤에 또 자가웃 폭설이 내려
비닐하우스가 몽땅 무너져내렸다
놀란 이장이 허겁지겁 마이크를 잡았다
― 워메, 지랄나부렀소잉!
어제 온 눈은 좆도 아닝께 싸게싸게 나오쇼잉!
왼종일 눈을 치우느라고
깡그리 녹초가 된 주민들은
회관에 모여 삼겹살에 소주를 마셨다
그날 밤 집집마다 모과빛 장지문에는
뒷물하는 아낙네의 실루엣이 비쳤다
다음날 새벽 잠에서 깬 이장이
밖을 내다보다가, 앗!, 소리쳤다
우편함과 문패만 빼꼼하게 보일 뿐
온 천지(天地)가 흰눈으로 뒤덮여 있었다
하느님이 행성(行星)만한 떡시루를 뒤엎은 듯
축사 지붕도 폭삭 무너져내렸다
좆심 뚝심 다 좋은 이장은
윗목에 놓인 뒷물대야를 내동댕이치며
우주(宇宙)의 미아(迷兒)가 된 듯 울부짖었다
― 주민 여러분! 워따. 귀신 곡하겠당께!
인자 우리 동네 몽땅 좆돼버렸쇼잉!
- 계간『시향』2006년 봄호
*****
에로티시즘의 해학성
오탁번의 시에는 성적인 상상력을 위주로 하는 작품들이 많다. 이런 시들은 대개 짓궂은 장난기를 보여줄 때가 많은데, 그러한 이유 때문인지 대부분의 경우 재기 발랄한 구어체의 대화 형식을 그 안에 내장시키고 있다. 그의 에로티시즘은 우수와 애상에 휩싸인 비장미의 형식을 보여주는 경우도 간혹 있으나 대체로 유쾌함과 골계미를 특징으로 한다. 천진난만한 성 묘사는 솔직하거나 느닷없어 독자들의 웃음을 불러일으킨다.
그리하여 그의 에로티시즘은 성적 욕망의 불일치를 나타내지 않으며, 무의식적인 세계에서 이루어지는 유폐적인 성적 언어를 추구하지 않는 채 인간미 넘치는 무구한 세계 인식을 보여주어 성의 세계가 지닌 가식과 은폐의 형상을 깨부순다. 오탁번 시의 해학성이 성적 이미지와 자주 연결될 수밖에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의 에로티시즘의 근간에는 이 세계의 비애와 불화를 단숨에 정화시킬 수 있는 맑고 천진한 시심이 들어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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