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르만 헷세의 - 내 작은 삶의 이야기
나는 궁수(弓手)자리 바로 아래에 있는 목성(木星)의 밝고 온화한 빛을 받으며 세상에 태어났다.
나는 어느 여름날 해질 무렵에 아무런 두려움 없이 태어났으며,
나의 온 삶을 통해 그 때의 따뜻함에 늘 애착을 가졌고,
그 따뜻함을 잃게 되면 감당할 수 없을 만큼의 슬픔과 비애를 느끼곤 했다.
이러한 감정의 섬세한 흐름 속에서 살아온 나는 자연히
추운 나라에서의 생활이란 생각할 수도 없어,
그래서 나의 자의적(自意的)인 모든 여행은 오직
따뜻한 남녘을 향해 이루어지거나 계획되어 있었다.
나는 태어날 때부터 양 같은 온순한 천성을 지니고 있어서
한쪽 으로만 쏠리는 감정의 나약함이 단점이긴 했지만,
어떠한 것이건 간에 규율에 얽매이는 것을 매우 싫어했다.
나는 다행스럽게도 아름답고 소중한 것들을
학교 생활이 시작되기 이전에 배울 수 있는 기회가 있었다.
나는 활달하고 민감하며 또한 섬세한 감각을 지니고 있어서,
언제나 그것에 따르고 즐길 수 있었던 것은 내 삶을 통해 볼 때 무척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그것은 내 생애를 통해 참으로 많은 것들을 깨닫게 해주고 또 많은 것을 얻을 수 있는 힘이 되었다.
학교 생활을 통해 배울 수 있었던 라틴어는 나에게 새로운 큰 즐 거움을 가져다 주어
모국어(母國語)인 독일어로 시를 짓는 것과 다름없이 라틴어로 시작(詩作)에 열중했다.
열세 살 때였으리라.
나는 시인이 되는가 아니면, 아무 것도 될 수 없을 것 같은 불안에 휩싸였다.
그러나 다른 모든 길에는 이끌어 주는 제도와 스승과 선배가 있었으나,
시인이 되는 길에는 아무 것도 보이지 않음을 비로소 깨달았던 것이다.
시인이 된다는 것은 참으로 막연한 길이었다.
그 길이란 자칫하면 웃음거리가 될 수 있는 너무나 막연한 환상과 같은 그림자였다.
그러나 나는 오래지 않아 곧 깨닫게 되었다.
시인은 되는 것이 아니라, 오직 존재할 뿐이라는 것을 체험하게 된 것이다.
시인은 언제 어디에서나 찬미와 찬탄을 받으며,
그러한 운명을 갖고 있는 다른 모든 존재들처럼
비범한 운명을 짊어지고 살아가야 한다는 것 을 나는 비로소 절감하게 되었다.
마침내 긴 방황과 고통 끝에 시인이 되겠다는 길을 선택하고 부터는
다른 모든 것들이 모호해지면서 집에서나 학교에서
남들이 이 해하기 힘든 사건들을 일으키게 되었다.
그리하여 마침내 나는 다른 도시의 라틴어 학교로,
또 그 이듬해에는 신학교로 옮기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것은 억압받은 내 청춘의 갈등이 나로 하여금 그곳을 끝끝내 떠나게 만들었던 것이다.
그런 뒤에도 학업에 대한 주위 사람들의 열망과
내 자신의 온갖 노력에도 불구하고 결국은 참담한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그리하여 나는 여러 방면의 기술의 도제(徒弟:어려 서부터 소송을 따라
기술을 배우는 제자)와 견습공으로 몇 년간을 전전 하지 않으면 안 되었던 것이다.
학업에 실패하고 난 후, 나는 내 스스로 가고자 하는
선택의 길에 있어서 내 나름대로의 수업을 시작했다.
포부 때부터 가전(家傳)되어 온 많은 장서 속에 묻혀서 독서와 습작에 전념할 수 있었던 것은
참으로 다행스럽고 행복한 순간 순간의 시간들이었다.
스무 살에 이르기까지 나는 내 눈에 띤 문학 서적들을 반쯤은 읽었으며,
철학과 예술사(藝術史)와 언어학 등에도
끈질기게 집념을 보였으며 또한 수 많은 습작을 할 수 있었다.
마침내 스스로의 힘으로 자신의 생활을 꾸려 가기 위해 나는 서점 점원으로 취직을 했다.
책과 더불어 산다는 것은 다른 어느 것보다도 확실히 나에게 알맞는 직업이었다.
책 속에 묻혀서 나는 처음에는 새로 나온 것들에만 집착하여 급급했는데
점차로 오래된 책(古書)과의 관계를 통해서 보다 더 정신적인 위안을 받으며
지혜를 터득해 갈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스물여섯 살 때 최초의 문학상이라는 것을 수상 받으면서
나는 그 동안 호구지책으로서의 책과의 씨름을 그만두기에 이르렀다.
이제 나는 시인으로서 존재하게 되었고,
그와 동시에 세상과의 지루하고 쓰디쓴 막연했던 생존과의 싸움을 그만두게 되었으며,
모든 고통의 기억들을 잠시 잊을 수가 있었다.
이 때까지 나에게 낙망하고 있었 던 가족과 친지들도 다시 미소를 지어 주었다.
비로소 나는. 위안과 승리를 누리게 되었던 것이다.
이제는 어떠한 일을 하더라도 나 자신이 너그러운 심성이 되고 ,
세상 사람들도 그것들을 가치로운 것 으로 생각하게 된 것이다.
그 동안 얼마나 무서운 고독과 금욕과 위험 속에서 살아온 것인가를 절감하고 있었다.
이렇듯 안정과 찬 사의 미풍이 불어오면서
차츰 나는 만족스러운 인간으로 변모되어 가고 있었다.
그 후 나는 여러 권의 책을 썼다.
그 덕택에 나는 아내와 아이들과 아름다운 정원이 있는 집을 지니게 되었다.
1905년, 나는 빌헬름 2세의 전제적 통치에 반대하는 한 잡지의 창간에 협조했다.
그리고 멀리 인도에 이르기까지 여행을 했다.
1914년 여름, 엄청난 시대가 도래하기 시작했다.
그 때까지의 평온한 생활이 불안한 기반 위에 서 있었다는 것을 비로소 깨닫게 되었다.
또다시 긴 터널과도 같은 그 커다란 삶의 불행한 교육이 시작되었다.
전쟁을 겪으면서 그 엄청난 시대를 통하여 의기양양해 하는 사람들 가운데서
나는 참담한 절망에 젖어 있었다.
어느 날, 그 비참한 심경의 고백을 통하여
나는 수많은 사람들과 신문들로부터 조국의 배신자라는 선고를 받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그 많은 친구들 중에서 나를 옹호하고자 한 사람들은 단 두 명에 불과했다.
낯모르는 사람들로부터는 모욕적인 편지가 수도 없이 날아왔다.
나는 다시 모든 것들과 층돌하면서 외톨이가 되었다.
바람직하고 이성적이고 좋은 일들과 현실 사이에는
암울한 심연이 가로놓여 있음을 다시금 겪게 된 것이다.
자기 성찰을 통하여 나는 자신의 고통과 책임이 나의 외부에서부 터가 아니라
내 자신의 내부에서 추구하도록 강요당하고 있음을 알았다.
왜냐하면 전세계의 광기와 포악성을 비난할 권리는 인간에 게도 신(神)에게도 없으며,
하물며 나에게는 더욱 없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세상의 추세나 동향에 대하여 감당할 수 없는
나 자신과의 충돌은 여러 가지의 혼란을 가져다 주었던 것 같다.
실제로 그것은 크나큰 혼란이었다.
자신의 내면의 혼란을 파악하여 그 정리를 시도한다는 것은 결코 유쾌한 일은 못되었다.
그리고 내가 현실과 유지하고 있 었던 평화를 나는 너무 값비싸게 치루었을 뿐만 아니라
그것은 세계의 외면적인 평화와 마찬가지로
너무나 터무니없는 장식품과 같은 것들이 아니었던가 싶다.
나는 신년 시절의 오랜 고통스러운 싸움을 통하여
세상에서 한 인간으로서의 지위를 획득할 수 있었고,
이제는 시인이 되었고 또 그렇게 믿고 있었다.
그 동안의 성공과 안락은 나에게 흔히 있는 경우처럼 안일과 나태에 젖게 하였다.
살펴본다면 오락적인 글을 쓰는 필자와의 구분이 애매했다.
그렇듯 나는 너무나도 안일에 빠져 있었던 것이다.
여의치 못하다는 것은 항상 유력하고 놓은 수업이 되지만,
그에 대해서는 충분히 대처할 수 있게끔 되어 있었다.
그리하여 나는 차츰 세상의 사소한 분쟁을 될 수 있는 한
그대로 내버려두어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전체의 혼란과 죄과에 대 해서는 내 나름대로 적당히 관여하게 되었다.
그러한 점을 나의 작품 속에서 발견할 수 있을지는 독자의 판단에 맡길 수밖에 없으리라.
시간의 흐름에 따라서 독일 국민 전체 모두는 아니더라도 대부분의 사람들이
새로운 자각과 책임 의식을 통하여 내가 겪은 것과 마 찬가지로
어떻게 해서 사악한 전쟁과 시류(時流)에 휘말려 죄를 짓게 되었던가,
그리고 어떻게 그 죄를 속죄할 수 있을 것인가 하는 물음을 제기하게 되었다.
이제 나는 인간이란 자신의 고 뇌와 죄과를 인정하고 끝까지 괴로와하면서
그 죄를 다른 사람들에게 전가하지 않는다면
언젠가는 그 죄에서 벗어날 수 있는 존재임을 확신하게 되었다.
나의 작품과 생활에 새로운 변화가 일기 시작하면서
상당수의 친구들이 고개를 저으며 멀어져 갔다.
아니면 많은 사람들이 나를 외 면하기도 했다.
그것은 매우 심각한 생활상의 변모를 요구하는 것이기도 했다.
그것은 내가 하루하루의 삶에 작별을 고하고, 자신이 이러한 일에 견디어 나갈 수 있을까 하고
매일같이 놀라와 하면서도 살아가고 있는 고통과 환멸과 상실만을 가져다 주는 것 같은
이 비정상직인 생활 속에서도 또한 그 무엇인가를 사랑하고 있었던 시절 이기도 하였다.
그러한 가운데서도 꼭 상기하고 싶은 것은 전쟁 중에도 나는
좋은 별, 즉 수호천사(守護天使) 같은 것이 나를 지켜주었다는 사실이다.
자신의 고뇌 속에서 피로와하고 있을 때
자신의 운명을 항상 불행한 것으로 여기고 자학자조(自虐自助)하고 있을 때
나의 고 뇌와 그 고 뇌의 상태가 외계에 대한
수호역으로서 방패로서 나에게 도움이 되 었던 것이다.
말하자면 진정을 통해 정치니, 첩보니, 애수니, 홍정 이니 하는
그 무렵의 사회악의 한가운데서 나는 내 삶을 버티며 살 았던 것이다.
스위스의 수도인 베른, 그곳은 독일과 중립국과 적국과의 외교 중심지였으며,
하루밤 사이에 각국의 외교관이라든가, 정치상의 밀 사라든가,
스파이와 저널리스트 사람과, 모리배와 밀수군들로 이미 포화상태가 되어버린 도시였다.
그와 같은 도시에서 나는 아무 것도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늘 나는 감시당하고, 탐색당하고 때로는 적 국인들로부터, 중립국 사람들로부터 아니면,
자국인들로부터 의심을 받고 있었건만, 당사자인 나는 그러한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
훨씬 뒤에서야 비로소 소문을 통해 알게 되었던 것이다.
아무튼 이렇다 할 만한 일없이 지나간 것이 신기할 정도였다.
전쟁의 종말과 내 심경의 마무리와 시련의 고통이 절정에 다다랐을 때였다.
그 고통은 전쟁이나 세계의 운명과는 상관이 없는 것이었다.
외국에 있던 우리들에게는 몇 년 전부터 예견되고 있었던
독일의 패망이라는 것도 그 당시에는 이미 놀라운 일이 못되었다.
나는 내 자신과 운명에 침잠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것은 우리 인간의 운명 전체에 관한 것이기도 하다는 느낌을 자주 감지하기도 했다.
나는 이 세상의 도처에서 일어나고 있는 전쟁과 살의(殺意)와
모든 경솔과 조잡한 침략욕과 비겁함을 나 자신 속에서 재발견하고 있었다.
그리고 나는 자신에 대한 자부심을, 경멸심을 모두 상실했다.
그리하여 혼돈의 저쪽에서 다시금 자연과 순수성을 발견할 수 있다는 희망이
가끔 불타오르고 꺼지고 했지만, 또 다른 혼돈을 응시 하는 일에 몰두하고 있었다.
눈을 뜬 사람, 진실로 자각한 사람은 누구나 한 번쯤은 통과하는
이 좁은 길을 필연코 가야만 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친한 친구들로부터 배반을 당하게 될 때면
비애를 느끼기도 했지만, 결코 불쾌해 하지는 않았다.
그러한 일은 오히려 나 자신의 길을 더욱 굳건히 해주는 것이라고 생각하겠끔 만들었다.
그들 측, 나의 오랜 벗들은 전에는 많은 것을 함께 공감할 수 있었는데,
이제는 인간적인 사건들로부터 초월하는 문제들에 집착하고 있는 나의 자세나
나의 내면의 세계를 이해할 수 없다고 하는 것도 당연하게 여겼다.
그 무렵의 나는 취미생활 같은 것에는 완전히 초월해 있었다.
또한 나의 말을 이해해 줄 만한 사람도 내 주위엔 없었던 것이다.
내가 구가(謳歌)하는 글이 아름다움과 조화를 잃고 있다고 우려하는 친구들의 맡은 지당했다.
그러나 그러한 비평이나 우려는 나로 하여금 실소케할 뿐이었다.
짧은 시한부 인생을 살고 있는, 또는 붕괴되는 벽 사이에 끼어
목숨만을 유지하려고 발버둥치는 삶을 살고 있는 인간에게 있어서
아름다움이나 조화 따위가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아마도 내 일생의 신조에 상반되게 시인이 아니었더라면
나의 생(生)의 끝은 어떠한 모습이었을까?
미적(美的)인 행위는 모두 하나의 미망(述妄)에 불과 했던 것일까?
그런데 왜 그럴까 하는 의문조차도 나에게는 이미 중요하지 않았다.
내가 나 자신을 투시하는 지옥의 순례 같은 괴로운 도정(遍程)에서
눈을 돌린 것의 대부분은 하찮고 무가치한 것들이었다.
아마도 그러한 무분별은 내 자신의 천직이나 천분에 대한 오판이기도 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것은 아무래도 좋았다.
내가 허영과 순진한 기쁨에 들뜬 나머지
일찍이 자신의 사명이라고 간주했던 것도 이제는 존재하지 않았다.
나는 나 자신의 사명, 사명이라기보다는 차라리 구원에의 길을
이미 오래 전부터 서정시(抒情詩)라든가
철학이라든가 하는 전문가의 이야기의 영역에서 찾지 않고
오로지 진정으로 살아 있는 힘차며 조그마한 것을 내 마음속에서 살리는 것에서,
마음속에 살아 있다는 것이 느껴지는 사물에 대하여
철저하고 성실하게 대하는 것에서 찾고 있었다.
그것이 바로 생명이며 신이었던 것이다.
마침내 전쟁이 끝난 1919년 봄,
나는 스위스의 한적한 시골로 들어가 은둔자가 되었다.
그 곳에서도 나는 평생토록 가업(家業)이기도 한
인도와 중국의 지혜에 대한 연구를 게을리 하지 않았다.
나의 새로운 체험이 때로는 동방의 비유에 가득찬 말로써 표현되었기 때문에
어떤 이들은 나를 '불교도'라고 부르기도 했다.
하지만 본질적으로 나는 불교 신앙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러나 나에 대한 그러한 별명 속에는 어떤 진실, 한 알의 진리가 들어 있는 것이다.
그 사실을 나는 나중에서야 비로소 깨닫게 되었다.
한 인간이 개인적으로 종교를 선택할 수 있다고 한다면
나는 마음 속으로부터의 동경때문에 틀림없이 너무나 오래 되고 가득찬
즉, 공자(孔子)의 말씀을 쫓았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우연히도 신앙 깊은 신교도의 집안에서 태어났으며
기질적으로도 신교도적이라고 단언할 수 있다.
그런데 존재보다도 생성(生成)을 보다 많이 긍정하도록 촉구한 점에서 본다면
불타(佛蛇: 석가모니)도 프로테스탄트적이 었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시인으로서의 내 존재와 나의 문학 작품의 가치에 대한 신념은
이렇게 변화를 겪으면서 내면 세계에서 그 뿌리가 뽑히고 말았다.
글을 쓴다는 것은 기쁨이 되지 못했다.
그러나 인간이란 결국 기쁨을 찾을 수밖에 없는 존재인 것이다.
나 역시 그 어떠한 고통을 당하는 경우에도 그것을 요구하고 절실하게 원했던 것이다.
정의라든가, 이성이라든가, 생활과 세계에 있어서의 의미를 단념할 수 없는 것과 같은 이치였다.
이렇듯 이 세상은 그러한 추상적인 것이 없어도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을 나는 깨닫고 있었다.
그런 어느 날 갑자기 나는 새로운 기쁨을 발견했다.
어느덧 나는 마흔 살이 되어 있었는데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 것이다.
스스로 화가라고 생각하지도 않았고 화가가 되고 싶다고 생각하지도 않았다.
다만 그림을 그린다는 작업은 기막히게 아름다운 일이었다.
그것은 사람을 즐겁게 하고 참을성 있게 만들었다.
그림을 그리고 나면 글을 쓴 뒤처럼 손가락이 시꺼멓게 되지 않고 은통 붉어지는 것이었다.
세상 사람들이 또다시 나를 비난한 것은 당연했는지도 모른다.
그것은 나에게 현실 감각이 결여되어 있다는 것이었다.
내가 짓는 시나, 내가 그리는 그림은 현실과 부합되지 않는다.
창작을 할 때 나는 흔히 교양 있는 독자가 정당한 저서에 대해서
요구하는 바를 망각해 버리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현실이란 별로 개의할 필요가 없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현존하는 것들이 나에게는 까마득히 멀리 보이기 때문에 나는 대개의 경우
남들처럼 미래까지도 과거와 연관지어 이렇다 할 구별없이 생각하기도 한다.
그러므로 나는 적지 않는 시간을 미래 속에서도 살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나의 전기(傳記)도 여기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고,
내가 이어갈 삶을 통하여 끝없이 상정되어 나갈 수 있을 것이다.
'읽어보아요 > 좋은 글' 카테고리의 다른 글
[스크랩] 살아가다 (0) | 2010.01.21 |
---|---|
이순신에 대한 일본의 기억 (0) | 2010.01.20 |
지내고 보면 모두가 그리운 것 뿐인데..... (0) | 2010.01.20 |
[스크랩] 한 여자를 울려 버린 사랑 이야기 (0) | 2010.01.19 |
[스크랩] 아침에 눈을 뜨면 생각나는 사람 (0) | 2010.01.1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