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산홍엽(滿山紅葉) 물아일체(物我一體)라
산과 시내 사이 바위 아래에 움막을 지으려 하니,
나의 뜻을 모르는 사람들은 비웃는다고 한다마는,
어리석고 시골뜨기인 내 마음에는
이것이 분수에 맞는 것이라 생각하노라
보리밥에 풋나물을 알맞게 먹은 후에
바위 끝이나 물가에서 마음껏 놀고 있노라
그 밖에 다른 일이야 부러워할 까닭이 있겠느냐
술잔을 들고 혼자 앉아서 먼 산을 바라보니
그리워하던 임이 온다고 한들
반가움이 이보다 더 하겠는가?
산이 말씀하거나 웃음을 짓지도 않건만
나는 그를 한없이 좋아하노라
누구인가 자연이 삼공보다 낫다고 하더니만
만승천자라고 한들 이만큼 좋겠는가?
이제 생각해 보니 소부와 허유가 영리했도다
아마도 자연 속에서 노니는 즐거움은 비길 데가 없으리라
윤선도의 '만흥(漫興)'중에서
명불허전(名不虛傳)이라더니 옛말 그른 것 하나 없더이다.
산상 산하 가릴 것 없이 만산홍엽(滿山紅葉)이라!
비가 예보된 일요일,
정오부터 비가 내린다기에 한나절이라도
다녀올 요량으로 홀로 이른 시각에 내장사로 향했습니다.
담양 한재골에서 백양사를 거쳐 내장사에 이르는
구도로는 드라이브코스로는 아주 좋은 길입니다.
그래서 일부러 고속도로도 피하고
새로 뚫린 4차로 도로도 마다하고
급한 마음에 악셀을 냅다 밟으면서도
물들대로 곱게 물든 가로수와 아름다운 주변 풍경들을
눈으로만 바라보며 미처 가을의 정취를 느낄 틈도 없이 내달렸지요.
운전을 하면서 한 가지 느낀 건
어쩌면 도로변의 풍경이 내장산 풍경보다도
아름다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었죠.
8시경 유료주차장에 주차를 하고
차안에서 김밥 한 줄에 탁배기 한 병을 비우고
단풍구경에 나섰습니다.
산행 전에 막걸리로 목을 축임은
술이 고파서가 아니라
나 또한 단풍처럼 붉게 물들어
그들과 함께하고 싶었음이라.
산책로에 들어서니 절정을 이룬 가을빛이
산에도 땅위에도 계곡위에도
온통 붉은 빛이니
말 그대로 만산홍엽(滿山紅葉)이라.
이럴 줄 알았더라면 나라도
독야청청(獨也靑靑)할 것을...
철없이 나까지 물들려는 우를 범했도다.
다행스럽게도 비가 예보된 탓인지
인산인해(人山人海)를 이루지는 않았다.
그 또한 번잡하지 않아 나를 행복하게 했다.
예상보다도 빨리 9시경부터 가느다란 가을비가 내리기 시작한다.
이슬비에 젖은 가을빛이 더욱 더 아름답고야.
산의 높은 곳까지 오르려는 생각을 버리니
발걸음도 마음도 느긋하기만 하다.
우산을 받쳐 들고 내장사를 둘러보고
원적계곡을 따라 원적암에 올랐다가
벽련암으로 향하며 주변 경관에 맞춰
마음까지 붉게 물들여본다.
벽련암을 지나 유난히도 풍광이 좋은 산중에
주저앉아 벽련암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는
부처님의 설법을 들으며
마음의 양식을 음미하며 얼굴을 물들여본다.
주변 자연과 색깔이라도 맞춰보려는 우매함으로...
허나 색깔만 같다고 하나가 될 수 있겠는가?
그러나 너무 나무라지는 마시라.
겨우 흉내 한번 내본 것 뿐인데...
깊을 대로 깊은 화려한 가을 산에 들어앉아
좋아하는 신선주 한잔을 들이키니
그걸 옛 선인들의 풍류에 비견이나 하련마는
그래도 오늘 만큼은 그 분들의 풍류가 부럽지 않더라.
그렇게 몸도 마음도 붉게 물들이며
가을빛에 젖고 가을비에 젖어
내장산과 더불어 노닐다가
얼굴에 단풍 빛이 스러질 즈음 백양사로 향했다.
내장사 단풍을 보고 백양사에 들어서니
왠지 단풍이 다소 시시한 느낌이 들었다.
그러나 또 거닐다보니 백양사만의 멋스러움이 느껴진다.
봄이면 화사하고 고매한 멋을 풍기는
백양사의 명품 매화나무 고불매의 모습이
오늘만큼은 왠지 조금 안쓰러워 보였다.
계곡을 따라 백학봉 아래 있는 약사암을 향해 오르다
발길을 되돌려 내려간다.
가인마을을 지나 고즈넉한 청류암까지 다녀오려다
이내 마음을 다잡고 하산했다.
오늘은 제발 적당히 좀 하고 내려오라는
마님의 당부를 잊지 않고 있었음이라.
몸도 마음도 붉게 물들었던 날
어둡기 전에 귀가해서 마님께 칭찬까지 들었다.
“오매, 써방님 오늘은 뭔 일로 이렇게 빨리 와부렀어^^”
겨울을 부르는 가을비가 내린다.
이 비가 내리고 나면 나뭇잎들도 갈 길을 재촉할 것이다.
나뭇잎이 땅에 떨어져 썩지 아니하면...
이렇게 또 한 번의 가을을 보낸다.
*** 백양사의 풍경은 다음 글로 따로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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