펜실베니아대학의 프레드릭 하이버트 박사는
[흑해가 담수호였을 무렵 사람들이 흑해 주위에
살? ?있었음을 알 수 있다]며
이들이 중동지역으로 퍼져 나가면서 다양한 ?
潤ゼ?신화가 탄생한 것 이라고 설명했다.
흑해의 역사
최초로 흑해를 찾아온 그리스인(人) 항해가가 연안에 살던
원주민에게 사살되었기 때문에 이 바다를 폰토스아크세노스
(이방인에게 비우호적인 바다)라고 불렀다고 한다.
그러나 BC 8∼6세기에는 연안에 올비아·판티카파이온·시노페 등
그리스의 식민시(市)가 발달하여 내륙의 스키타이인(人)이나 ?
潁8뗬??人)들과 곡물·노예·포도주·무기 등의 교역으로
번영하였기 때문에 폰토스에우크세이노스
(이방인에게 우호적인 바다)라고 불렀다.
그후 BC 1세기에는 폼페이우스의 동방 진출로 남서안이 로마령(領)이 되었고,
이어 BC 2세기 초에는 트라야누스 황제에 의하여 연안의 대부분이
투르크의 바다가 되었을때
비로소 [흑해]라고 불리게 되었다.
이는 광막한 바다에서 이따금 때아닌 폭풍이나 짙은 안개로
위험에 휩싸이게 되는 데서 유래하였다.
]근대에 이? 7?투르크 제국이 쇠퇴하기 시작하자 러시아의 남진이
재개되어(17세기 말)표트르 대제(大帝)의 아조프 점령에 이어
수차의 러시아-투르크전쟁에서 러시아는 차차 흑해의
지배권을 장악하였고(18∼19세기),
이윽고 지중해로 진출할 태세를 갖추었다.
여기에 열강(특히 영국·프랑스)의 이해가 충돌,
결국 크림 전쟁(1853∼1856)을 초래하였다.
러시아는 패배하여 ! 기득권(특히 함대 보유권과 연안 요새 구축권)을
상실하고 흑해의 중립화가 확립되었다.
러시아는 그후에도 집요하게 지배권의 회복을
도모하였으나 성공하지 못했다.
회의(1936)를 거쳐 현재 흑해는 모든 나라의 상선(商船)에 개방되어 있다.
그러나 군함에 대해서만은 연안에 영토가 없는 나라는
제한(4만 5,000t 이상은 집결할 수 없음)을 받는다.
출입구인 보스포루스 해협과 다르다넬스 해협의 군함 통항권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