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0년 3월 항일투사 안중근(1879∼1910) 의사가 만주의 여순(旅順) 감옥 에서 남긴 글씨로
칠언절구의 자작시를 쓴 것이다.
동양대세 생각하매 아득하고 캄캄하니 東洋大勢思杳玄 뜻 있는 사나이 어찌 편히 잠들겠는가 有志男兒豈安眠 평화시국 못 이룸이 아직도 북받치는데 和局未成猶慷慨 정략을 고치지 않으니 참으로 불쌍하다 政__不改眞可憐
암담한 동양의 대세를 생각해보니 뜻을 이루지 못하고 죽음을 맞이해야 하는 자신에 대한
비탄이다. 또 아직 평화의 시국을 이루지 못한 것이 더욱 개탄스럽고, 게다가 정략
즉 침략정책을 버리지 못하는 일본이 불쌍하다는 역설적인 표현이다. 단국대학교 소장의
유묵(보물 제569-21호)에서 "欲保東洋 先改政 時過失機 追悔何及(동양을 보존하려 한다면
우선 정략을 고쳐야 하니 때가 지나 기회를 놓치면 후회한들 무슨 소용이랴)"라고 한 것과
일맥상통하는 내용이다.
이들 내용과 관련하여 안 의사는 옥중에서 ≪안응칠역사(安應七歷史)≫와
≪동양평화론(東洋平和論)≫을 지었다.
그중 자서전인 ≪안응칠역사≫는 완성되었지만, 논설 ≪동양평화론≫은 서문과
<전감(前鑑) 1>만 지어졌고 나머지 <현상(現狀) 2> <복선(伏線) 3> <문답(問答) >」는
목차만 제시된 채 미완성으로 남았다. 당시 안 의사가 이를 집필하기 위해 사형집행 날짜를
한 달쯤 늦추도록 고등법원장 히라이시(平石)에게 청하여 그의 쾌락을 받았으나
결국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다.
≪동양평화론≫의 서문에서 안 의사는 "若政略不改逼迫日甚則不得已寧亡於異族不忍受辱於
同種 議論湧出於韓淸兩國人之肺腑 上下一體 自爲白人之前驅 明若觀火之勢矣. 然則…
(만약 정략을 고치지 않고 핍박이 날로 심해지면, 차라리 다른 인종에게 망할지언정 차마
같은 인종[황인종]에게 욕을 당할 수는 없다는 의론이 한국·청국 두 나라 사람의 마음속에
용솟음쳐 위ㆍ아래가 한 몸이 되어 스스로 여러 사람 앞에 나설 수밖에 없음이 불을 보듯
뻔한 형세이다. 그렇게 되면…)"이라 하여 일제의 침략정책을 경고한 적이 있다.
한편 유묵 앞쪽에는 "贈仙境先生(증선경선생)"이라 쓰여있고, 말미에 "庚戌三月於旅順獄中
大韓國人 安應七 謹拜"라는 낙관과 장인(掌印)이 찍혀있다. 글씨를 증여받은 '선경'이
누구인지는 확인되지 않으나 혹시 안 의사를 심문하던 통감부 경시(警視) 사카이(境喜明)가
아닐까 한다. 안 의사의 유묵 가운데 드물게 응칠이란 자(字)가 쓰였는데, ≪안응칠역사≫에
따르면 그의 가슴과 배에 일곱 개의 검은 점이 있어, 자를 응칠이라 하였다고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