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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어보아요/세상 이야기

[스크랩] 아빠의 역할

서까래 2010. 3. 1. 14:27

 

오늘 아침 매경 칼럼입니다.

 

 

[세상사는 이야기] 아빠의 역할

얼마 전 이런 얘기를 들었다. 요즘 부모들은 아들보다 딸을 더 원한다는 얘기. 딸 키우는 기쁨이 아들과 전쟁하는 것보다 훨씬 더 쏠쏠하다는 게 이유라 했다. 이제 대세는 딸인 모양이다. 일찍이 이런 기운을 감지한 나는 딸 하나를 두고 있다. 아들 없는 외동딸이다. 올해 중학교를 졸업하고 고등학교에 간다. 딸은 공부도 보통이고 외모도 보통이고 생각도 보통이고, 그냥 보통 아이다. 사실 요즘 아이들 보통으로 커주는 게 어디 말처럼 쉬운 일인가. 그래서 나는 보통 아이로 커준 딸이 고맙기 그지없다.

그런데 얼마 전 이 보통 아이가 보통이 넘는 이야기를 꺼냈다. 고등학교에 가서 악기를 전공하겠다는 거다. 뜬금없다는 말은 이럴 때 쓰는 것이리라. 악기라고는 어릴 때 피아노 조금, 그리고 노래방에서 탬버린 잠깐 잡아본 게 전부인, 그러니까 음악적으로도 분명 보통인 아이가 악기를 하겠다니. 아빠는 처음엔 코웃음을 쳤다. 그냥 저러다 말겠지 했다. 그런데 며칠이 지나도 딸 생각은 변함이 없어 보였다. 아니 오히려 더 적극적으로 또 구체적으로 그 학교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딸 키운 지 16년. 그동안 딸은 이처럼 적극적인 모습을 보인 적이 없다. 도대체 어떤 매력이 딸을 흔들었을까. 아빠도 은근히 관심이 생겼다. 인터넷을 뒤져서 알아봤다. 그 학교는 대원여고라는 인문계 학교인데, 관악예술과를 딱 한 반만 뽑아 실기 위주로 교육을 한다는 거였다. 아빠가 학교 이름 두 글자를 겨우 알 즈음에 딸은 이미 그 학교에 다니는 언니를 찾아내 만나고 왔다. 엄마를 졸라 그 학교를 찾아갔고, 선생님을 만나 상담까지 하고 왔다. 혼자 진도를 팍팍 나가버린 것이다.

이제 아빠는 대답을 해야 했다. 하지만 아빠 역시 음악에 대해 아는 게 없으니 판단이 쉽지 않았다. 아빠는 엄마에게 돼지고기를 삶아 달라고 부탁했다. 그리고 소주 두 병을 꺼냈다. 부부는 소주잔을 기울이며 서로 생각을 나눴다. 대학에 가려면 이미 악기를 하고 있는 보통이 넘는 아이들을 넘어서야 한다. 대학을 나와도 번듯한 내 일을 가질 것이라는 보장은 없다. 소주 한 병을 비울 때까지는 말려야겠다는 생각이 아빠를 지배했다.

취기가 조금 올라서였을까? 문득 `아빠의 역할`이 과연 무엇일까 하는 근본적인 생각이 들었다. 딸을 잘 키우는 것? 그래, 그럴지도 모르지. 그렇다면 `잘`은 어떤 의미일까? 또 `키우다`라는 범위는 어디에서부터 어디까지일까? 생각이 꼬리를 물었다. 그러고 보니 아빠라는 사람이 그동안 아빠의 역할에 대해 한 번도 고민해 본 적이 없었다. 참으로 대책 없는 아빠였다. 그러나 아무리 대책 없는 아빠일지라도 결론을 더 미룰 수는 없었다. 술자리가 끝날 무렵 어렵게 생각이 정리되었다.(아니, 생각이 정리되자 술자리가 끝난 셈이다.)

아빠의 역할은 딸에게 이리 가라, 저리 가라 하는 것이 아닐 것이라는 것. 딸이 자기 길을 걸어가면 그 뒤를 졸졸 따라가며 지켜봐주는 것. 그러다 딸이 길바닥에 넘어져 울고 있으면 그때 손을 내미는 것. 그리고 따뜻하게 안아주는 것. 이것이 아빠의 역할일 거라는 나름의 결론이었다. 딸이 세상에 태어나서 처음으로 하고 싶은 일을 만났는데, 아빠라는 높이로 이를 막을 수는 없어. 만약 딸이 악기와 끝내 친해지지 못하고 주저앉는다면, 그래 그때가 바로 아빠가 정말 필요할 때일 거야. 아빠는 마지막 잔을 비우며 딸에 대한 조급한 욕심도 비웠다.

딸은 운 좋게 합격했다. 이제 며칠 후면 관악예술과 1학년이 될 것이다. 그리고 늘 악기를 품에 안고 잠들 것이다. 아빠는 잠든 딸을 지켜볼 것이다. 네 생각이 틀리지 않았다는 것을 아빠에게 보여줘, 아빠는 너를 믿어, 하는 따뜻한 눈으로.

[정철 카피라이터]


[ⓒ 매일경제]


출처 : 노무현을 사랑하는 모임 (노사모 Cafe)
글쓴이 : 정철카피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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