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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명주옷 차림의 안중근, 죽음을 달관한 그의 눈빛

서까래 2010. 3. 2. 00:25


명주옷 차림의 안중근, 죽음을 달관한 그의 눈빛  

당시 뤼순 형무소장 편지로 재구성한 의사의 마지막 옥중 생활

  

▶1910년 3월 26일 촬영된 순국 직전의 안중근 의사. 지금까지 알려진 사진이 복사에 복사를 거듭하며 흐릿했던 것과 달리 화질이 섬세하다. 일본 국회도서관에 소장된 이 사진을 최근 새로 찍어와서 예술의전당 서예박물관에서 전시한다. 안중근 의사의 장엄한 최후가 보다 선명하게 드러나 보이는 듯하다. [춘천MBC 제공]



순국 100돌을 맞은 안중근 의사의 최후는 의연하고 장엄했다. 순국 직전 찍은 사진(일본 국회도서관 소장)을 보자. 고국의 어머니가 지어 보낸 명주옷으로 갈아입은 그의 얼굴에서 사형을 앞둔 이의 초조한 모습을 찾을 수 없다. ‘만주일일신문’(1910년 2월 23일자) 보도를 보면, 안중근은 입감될 당시 14관 400양(54.5㎏)이었는데, 사형선고를 받은 이후 14관 940양(56.5㎏)으로 체중이 2㎏이나 늘었다. 만주일일신문은 ‘특이한 일’이라고 보도했다(신운용 지음 『안중근과 한국근대사』 참조).

안중근의 삶과 사상을 주제로 박사학위를 받은 신운용 박사는 “대개 사형선고를 받은 후엔 불안감으로 몸무게가 현저하게 주는 것이 일반적인 현상임에 비추어볼 때 안중근 의사의 경우는 죽음을 앞두고서도 심리상태가 안정되어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해석했다.

안중근의 비범한 담대함은 이번에 실물 원본이 공개된 뤼순 감옥 구리하라 전옥(형무소장급 직위)의 편지에서도 발견된다. 구리하라가 조선통감부의 사카이 경시에게 보낸 편지에서 안중근 의사 최후의 면모를 발견하는 것은 일종의 아이러니다. 순국 직전까지 안중근의 가슴 속에는 미완성으로 끝난 저서 『동양평화론』 생각밖에 없었던 것 같다.

편지는 1910년 3월 19일에 쓰였다. 안 의사가 순국(3월 26일)하기 일주일 전이다. 편지에는 안 의사 최후를 유추해볼 수 있는 상황이 적혀 있다. 구리하라는 안 의사에게 감옥 생활의 편의를 제공해준 인물이다. 안 의사가 비교적 좋게 평한 일본인 가운데 한 명이기도 하다. 조선통감부 소속 사카이 경시(총경급 직위)는 뤼순 감옥에 파견돼 안중근 의사를 12회 이상 신문한 바 있다. 일본의 고위 경찰 간부 사이의 딱딱한 업무 보고일 수도 있지만, 그런 문건 속에서조차 안중근의 면모는 축소되지 않는 것이다.

안 의사에게 사형이 언도된 것은 1910년 2월 14일이었다. 사형 언도 3일 후 안중근은 고등법원장 히라이시와 면회한다. 『동양평화론』 집필을 위한 시간을 벌기 위해서였다. 당초 히라이시는 긍정적이었던 것으로 알려진다. 안중근은 상고도 포기했다. 안중근 최후의 모습은 『동양평화론』 완성에 초점을 맞추었을 뿐 생사를 이미 초월한 모습으로 여겨진다. 상고를 포기한 데는 “깨끗이 죽음을 맞이하라”는 어머니 조 마리아의 전언도 크게 작용했다. 두 동생이 어머니 말씀을 전했다.

안 의사는 3월 15일 자서전 『안응칠역사』를 탈고한다. 곧 이어 『동양평화론』 집필에 착수했다. 하지만 『동양평화론』을 완성하기에는 시간이 너무 부족했다. 예정된 사형을 15일 연기해달라고 요청을 했지만 끝내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이 대목과 관련 구리하라의 편지에서 주목되는 구절은 이것이다.

“『동양평화론』도 쓰기 시작하여 현재 서론이 끝났다. (…) 본인은 철저하게 『동양평화론』의 완성을 원하고, 사후에 반드시 빛을 볼 것으로 믿기 때문에 얼마 전 논문 저술을 이유로 사형의 집행을 15일 정도 연기될 수 있도록 탄원하였으나 허가되지 않을 것 같아 결국 『동양평화론』의 완성은 바라기 어려울 것 같다.”

구리하라가 볼 때, 안중근은 철저하게 『동양평화론』의 완성을 원하고 있었으며 사후에 반드시 빛을 볼 것으로 믿고 있었던 것이다. 안중근의 『동양평화론』은 100년이 지난 오늘 동아시아공동체 담론의 원조이자 유럽공동체 탄생보다도 70년 전에 제시한 평화 구상으로 재평가 받고 있다. 안 의사는 침략과 지배가 아닌 평화와 상생의 동아시아를 희구했었다.

안중근의 최후와 관련 특히 주목해야 하는 것은 감옥에서 쓴 유묵(생전에 남긴 글씨나 그림)이다. 유묵들은 모두 사형이 언도된 2월 14일 이후 쓰였다. 그것도 모두 일본인의 요청에 의해 쓰인 것이었다. 상고도 포기하고 죽음을 앞둔 31세의 ‘장부 안중근’의 필체는 흔들림이 없다. 동양평화의 정신이 잘 표현된 유묵으로는 다음의 시가 손꼽힌다.

“동양대세 생각하매 아득하고 캄캄하다(東洋大勢思杳玄)/ 뜻 있는 사나이 어찌 편히 잠들겠는가(有志男兒豈安眠)/ 평화정국 못 이루었으니 한탄스럽기 그지없다(和局未成猶慷慨)/ 침략정책을 고치지 않으니 참으로 가련하다(政略不改眞可憐).”

이 시는 구리하라 편지의 수신인 사카이에게 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사형 집행을 하루 앞둔 25일 사카이 경시가 『동양평화론』의 미완을 애석히 여겨 안 의사에게 결론만이라도 써주기를 요청하자 쓴 시라는 것이다.

구리하라의 편지 보고서 원본은 25일 예술의전당 서예박물관에서 시작되는 ‘안중근 유묵전’ 연장전시에서 감상할 수 있다.

[중앙일보] 2010-01-26 / 배영대 기자

 

 

 

안중근 의사 명언 유묵 18점


                   



                          














日不讀書口中生荊棘 (일일불독서구중생형극)
하루라도 글을 읽지 않으면 입안에 가시가 돋는다.
                                              





忍 耐 (인내)
참고 견딘다는
안의사 평생의 좌우명

                        

                        

                        













天堂之福永遠之樂 (천당지복 영원지락)
천당의 복은 영원한 즐거움이다.

                        
                        


                        















黃金百萬兩不如一敎子 (황금백만량불여일교자)
황금 백만냥도 자식 하나 가르침만 못하다.

        
                     
 
 
                        













貧而無諂富而無驕(빈이무첨,부이무교)
가난하되 아첨하지 않고 부유하되 교만하지 않는다.


                       

         
                  













丈夫雖死心如鐵 義士臨危氣似雲
(장부수사심여철, 의사임위기사운)
장부가 비록 죽을지라도 마음은 쇠와 같고 의사는
위태로움에 이를지라도 기운이 구름같도다.

                                            


                        














恥惡衣惡食者不足與議 (치오의오식자부족여식)
궂은 옷,궂은 밥을 부끄러워하는 자는 더불어 의논할 수 없다.

                        

                        
              
孤莫孤於自恃 (고막고어자시)
스스로 잘난체 하는것보다 더 외로운것은 없다.

                                              



                        













博學於文約之以禮 (박학어문약지이례)
글공부를 널리 하고 예법으로 몸단속하라.

                        

                        


                        













人無遠慮難成大業(인무원여난성대업)
사람이 멀리 생각하지 못하면 큰일을 이루기 어렵다.

                                              



                        













爲國獻身軍人本分(위국헌신군인본분)
나라위해 몸 바침은 군인의 본분이다.

                        
    


                  

                        















歲寒然後知松柏之不彫(세한연후지송백지부조)
눈보라 친 연후에야 잣나무가 이울지 않음을 안다

                        

                        

                        












白日莫虛渡靑春不再來(백일막허도 청춘부재래)
세월을 헛되이 보내지 말라. 청춘은 다시 오지 않는다.

                        

                        



                        















年年歲歲花相似歲歲年年人不同 (년연세세화상사 세세연년인부동)
해마다 계절따라 같은 꽃이 피건만 해마다 사람들은 같지 않고 변하네
                                                


            
自 愛 寶(자애보)
스스로를 보배처럼 사랑하라.

                                              



                        











國家安危勞心焦思 (국가안위 노심초사)
국가와 안위를 걱정하고 애태운다.

                        

                        



                        












見利思義見危授命 (견리사의 견위사명)
위익을 보거든 정의를 생각하고
위태로움을 보거든 목숨을 바쳐라.
                        

                        



                        











百忍堂中有泰和 (백인당중유태화)
백번 참는 집안에 태평과 화목이 있다.


 


 

 

      [안중근의사 의거 100주년] 안중근 의사의 삶과 신앙


임종 직전까지 동양평화 위해 미사 봉헌. 부친과 함께 전교, 공소 설립 등 황해지역 복음화 기여.의병전쟁 중 매일 기도 … 죽음 앞둔 동료 위해 대세도. 사형 선고 직후 고해성사 … 장남 사제될 것 유언 남겨



1879년 황해도 해주에서 태어난 안중근(토마스) 의사는 부친 안태훈(베드로)의 인도로 빌렘 신부(한국명 홍석구·파리 외방전교회)에게 세례를 받고 신앙의 길로 들어섰다. 입교 후 그는 철저한 기도와 수덕생활을 했던 것으로 알려진다.


안 의사는 부친과 함께 19세기 말 황해도 지역에서 천주교가 성장하는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 특히 안 의사는 빌렘 신부의 '복사'로 해주, 옹진 등을 함께 다니며 전교활동을 펼쳤으며 청계동공소 설립은 물론 청계동본당 설정에 기여함으로써 청계동이 황해도에서 선교의 중심이 되도록 했다

1897년 빌렘 신부가 청계동본당 주임으로 부임한 것을 계기로 안 의사는 전교활동에 적극적으로 나서 7개 마을을 천주교로 개종시키는 등 눈부신 결실을 거뒀다. 이런 그의 투신은 1897년 555명에 불과하던 황해도 지역 천주교 신자가 5년만인 1902년에 7000여 명에 이를 정도로 폭발적으로 늘어나는데 큰 역할을 했다.
                                                                                 ▲ 안중근 의사가 수감됐던 뤼순 감옥의 감방 내부.
                                                                                  안 의사는 이곳에서 그의 자서전 '안응칠역사'와
                                                                             '동양평화론'을 집필했고 수많은 필묵 유작을 남겼다.

본격적으로 의병전쟁에 뛰어든 후에도 안 의사는 하루도 기도를 빠뜨리지 않을 정도로 신앙생활에 철저했으며, 죽음이 임박한 동료에게 대세를 베풀기도 하는 등 투철한 신앙인의 면모를 보였다.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자세는 일상에서도 그대로 드러나 안 의사는 함부로 인명을 해치는 일을 삼갔다. 의병전쟁 중 일본군을 생포했을 때도 포로에 대한 즉결처분은 살인행위라며 석방하기도 했다. 이러한 태도는 살인을 금하던 천주교 교리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결국 이토 히로부미를 죽인 의거도 비복음적이고 비그리스도적인 폭력적 현실에 대해 항거한 신앙적 확신에 의한 것이었다. 그는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할 때 총알에 십자가를 새겨 넣으며 의거가 성공할 수 있길 기도했고 거사가 성공한 후에는 먼저 감사기도를 바치고 가슴에 성호를 그은 다음 비로소 '대한독립 만세'를 불렀다.

안 의사는 거사 후 체포돼 죽음을 눈앞에 두고 있으면서도 가족에게 자신의 장남을 성직자로 키워달라는 유언을 남기고, 성직자들에게는 민족복음화를 위한 노력을 당부하고 자신의 처형을 성금요일에 집행해줄 것을 부탁하는 등 철저한 신앙인의 모습을 잃지 않았다.

안 의사가 어머니에게 남긴 옥중편지는 그의 일관된 신앙을 잘 보여준다

'어머님 전 상서. 예수를 찬미합니다.…이 세상의 일이야말로 모두 주님의 명령에 달려 있으니…분도(안 의사의 장남)는 장차 신부가 되게 길러 주시기를 바라오며, 훗날에도 잊지 마시고 천주께 바치는 몸이 되도록 키워주소서.…이 밖에도 드릴 말씀이 많사오나, 훗날 천당에서 기쁘게 만나 뵈올 때 다른 말씀은 드리겠습니다. 위아래 여러분께 인사도 드리지 못하오니, 신앙을 열심히 지키셔서 훗날 천당에서 기쁘게 만나 뵙겠다고 전해 주시기 바랍니다.'

안 의사가 의거 후 체포될 때부터 사형 집행 때까지 통역을 맡았던 소노키 스에키가 일본 외무성과 조선 통감부에 보냈던 공식 보고서에 따르면, 안 의사는 사형이 선고되자 항소를 포기하고 곧바로 사람을 죽인 죄를 씻고자 빌렘 신부를 청해 고해성사를 했으며, 죽음에 앞서 빌렘 신부와 마지막 미사를 봉헌하는 등 신앙인으로서 의연한 모습을 보였다.

이렇듯 안 의사는 나라를 위해 자신을 희생한 의인이기에 앞서 회개와 평화, 인간애라는 시대의 징표를 살아간 신앙인의 모습을 보여준다.

통역 스에키는 안 의사의 마지막 순간을 이렇게 전한다. '(안중근이) 동양평화의 삼창을 하도록 허가해줄 것을 제의했는데 전옥은 그렇게 할 수 없다는 뜻을 설명하고 간수로 하여금 백지와 흰 천으로 눈을 가리고 특별히 기도를 드릴 것을 허가하니 안중근은 2분여 묵도를 했다. 그리하여 두 사람의 간수가 데리고 계단으로 교수대에 올라 태연하게 형 집행을 받았다. 때는 10시를 조금 넘은 4분이며 15분에 이르러 감옥의가 시체를 검사하고 절명하였다는 보고를 하기에 이르러 이에 집행을 끝내고 일동 퇴장하였다.'

안 의사는 죽을 때까지 주님께서 주시는 참 평화를 갈구한 참 그리스도인이었다.


▲ 안중근 의사가 조선 침략의 원흉 이토 히로부미를 암살하던 당시 모습을 재현한 그림.



■ 안중근 의사 연보

▶ 1879년 9월 2일(음력 7월 16일)
황해도 해주부 수양산 아래 황석동에서 아버지 안태훈과 어머니 백천조 사이에서 3남1녀 중 장남으로 태어남.

▶ 1897년 1월 중순
빌렘 신부로부터 토마스란 이름으로 세례를 받음. 빌렘 신부와 함께 선교에 나섬.

▶ 1898년
청계동본당이 설립되자 초대 주임 빌렘 신부를 수행해 황해도 지역 선교활동에 열중함.

▶ 1899∼1904년
교회의 총대로 추대되어 교우들의 난제 해결에 앞장섬.

▶ 1906년
가족을 이끌고 진남포로 이사, 육영사업에 헌신.

▶ 1907년
국채보상운동에 참여. 간도 연해주 지역으로 망명, 독립투쟁을 시작함.

▶ 1908년
의병부대를 조직, 참모중장의 임무를 맡아 국내진입작전을 도모함.

▶ 1909년 10월 초
이토 히로부미가 하얼빈에 도착한다는 사실을 알고 거사를 결심함.

▶ 1909년 10월 26일(음력 9월 13일)
하얼빈 역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총살함.

▶ 1909년 10월 30일경
하얼빈 일본 총영사관에서 검찰관의 심문을 받고 뤼순 관동도독부 감옥으로 이감.

▶ 1910년 3월 8일
뤼순감옥으로 찾아온 빌렘 신부에게 고해성사.

▶ 1910년 3월 15일
자서전 '안응칠역사'를 탈고하고 '동양평화론'을 쓰기 시작함. '국가안위노심초사', '일일부독서 구중생형극' 등 많은 유작을 남기기 시작함.

▶ 1910년 3월 26일
고향에서 보내온 조선옷으로 갈아입고 뤼순감옥 형장에서 교수형으로 순국.

서상덕 기자

 

출처 : 어둠 속에 갇힌 불꽃
글쓴이 : 정중규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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