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눈 오는 날 만나자... 정 호 승
사랑보다 소중한 슬픔을 주겠다. 겨울밤 거리에서 귤 몇개 놓고 살아온 추위와 떨고 있는 할머니에게 귤값을 깍으면서 기뻐하던 너를 위하여 나는 슬픔의 평등한 얼굴을 보여 주겠다. 내가 어둠 속에서 너를 부를 때 단 한 번도 평등하게 웃어 주질 않은 가마니에 덮인 동사자가 다시 얼어죽을 때 가마니 한 장조차 덮어주지 않은 무관심한 너의 사랑을 위해 흘릴 줄 모르는 너의 눈물을 위해 나는 이제 너에게도 기다림을 주겠다. 이 세상에 내리던 함박눈을 멈추겠다. 보리밭에 내리던 봄눈들을 데리고 추워 떠는 사람들의 슬픔에게 다녀와서 눈 그친 눈길을 너와 함께 걷겠다. 슬픔의 힘에 대한 이야길 하며 기다림의 슬픔까지 걸어가겠다.
첫키스에 대하여
내가 난생 처음으로 바라본 바다였다 희디흰 목덜미를 드러내고 끊임없이 달려오던 삼각파도였다 보지 않으려다 보지 않으려다 기어이 보고 만 수평선이었다 파도를 차고 오르는 갈매기떼들을 보며 나도 모르게 수평선 너머로 넘어지던 순간의 순간이었다 수평선으로 난 오솔길 여기저기 무더기로 피어난 해당화 그 붉은 꽃잎들의 눈물이었다
또 기다리는 편지
수선화에게
구두 닦는 소년
구두를 닦으며 별을 닦는다 구두통에 새벽별 가득 따 담고 별을 잃은 사람들에게 하나씩 골고루 나눠주기 위해 구두를 닦으며 별을 닦는다 하루내 길바닥에 홀로 앉아서 사람들 발 아래 짓밟혀 나뒹구는 지난밤 별똥별도 주워서 담고 하늘 숨은 낮별도 꺼내 담는다 이 세상 별빛 한 손에 모아 어머니 아침마다 거울을 닦듯 구두 닦는 사람들 목숨 닦는다 저녁별 가득 든 구두통 메고 겨울밤 골목길 걸어서 가면 사람들은 하나씩 별을 안고 돌아가고 발자국에 고이는 별바람 소리 따라 가랑잎 같은 손만 굴러서 간다
사랑
그대는 내 슬픈 운명의 기쁨 내가 기도할 수 없을 때 기도하는 기도 내 영혼이 가난할 때 부르는 노래 모든 시인들이 죽은 뒤에 다시 쓰는 시 모든 애인들이 끝끝내 지키는 깨끗한 눈물 오늘도 나는 그대를 사랑하는 날보다 원망하는 날들이 더 많았나니 창 밖에 가난한 등불 하나 내어 걸고 기다림 때문에 그대를 사랑하고 사랑하기 때문에 그대를 기다리나니 그대는 결국 침묵을 깨뜨리는 침묵 아무리 걸어가도 끝없는 새벽길 새벽 달빛 위에 앉아 있던 겨울산 작은 나뭇가지 위에 잠들던 바다 우리가 사랑이라고 부르던 사막의 마지막 별빛 언젠가 내 가슴 속 봄날에 피었던 흰 냉이꽃
길이 끝나는 곳에 산이 있었다 산이 끝나는 곳에 길이 있었다 다시 길이 끝나는 곳에 산이 있었다 산이 끝나는 곳에 네가 있었다 무릎과 무릎사이에 얼굴을 묻고 울고 있었다
미안하다 너를 사랑해서 미안하다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에게
슬픔의 가난한 나그네가 되소서 하늘의 별로서 슬픔을 노래하며 어디에서나 간절히 슬퍼할 수 있고 어디에서나 슬픔을 위로할 수 있는 슬픔의 가난한 나그네가 되소서 슬픔처럼 가난한 것 없을지라 가장 먼저 미래의 귀를 세우고 별을 보며 밤새도록 떠돌며 가소서 떠돌면서 슬픔을 노래하며 가소서 별 속에서 별을 보는 나그네 되어 꿈 속에서 꿈을 보는 나그네 되어 오늘밤 어느 집 담벼락에 홀로 기대보소서
강물
별들은 따뜻하다
이별노래
떠나는 그대 조금만 더 늦게 떠나준다면 그대 떠난 뒤에도 내 그대를 사랑하기에 아직 늦지 않으리
그대 떠나는 곳 내 먼저 떠나가서 나는 그대 뒷모습에 깔리는 노을이 되리니
옷깃을 여미고 어둠속에서 사람의 집들이 어두워지면 내 그대 위해 노래하는 별이 되리니
떠나는 그대 조금만 더 늦게 떠나준다면 그대 떠난 뒤에도 내 그대를 사랑하기에 아직 늦지 않으리
첨성대(瞻星臺) - 1973년 대한일보 신춘문예 당선작
一平生 꺼내보던 손거울 깨뜨리고 소나기 오듯 흘리신 할머니 눈물로 밤이면 나는 홀로 첨성대가 되었다.
할아버지 대피리 밤새불던 그믐밤 첨성대 꺽 껴안고 눈을 감은 할머니 繡놓던 첨성대의 등잔불이 되었다.
댕기 댕기 꽃댕기 붉은댕기 흔들며 벌 속으로 달아난 순네를 따라 冬至날 흐린 눈물 北極星이 되었다.
첨성대 우물 속에 퐁당퐁당 빠지고 나는 홀로 빙 빙 첨성대를 돌면서 첨성대에 떨어지는 별을 주웠다.
할머니 눈물 속 별들의 언덕위에 버려진 버선 한 짝 남몰래 흐느끼고 붉은 명주 옷고름도 밤새 울었다.
토함산 별을 따라 산을 내려와 첨성대에 던져논 할머니 銀비녀에 밤이면 내려앉은 산여우 울음소리.
동해바다 별 재우는 잔물결소리 첨성대 앞 푸른 봄길 보리밭 길을 빚장이 따라가던 송아지 울음소리.
보름달이 첨성대에 내려 앉는다. 할아버진 대지팡이 첨성대에 기대놓고 온 마을 石燈마다 불을 밝힌다.
첨성대 속으로만 산길가듯 걸어가서 나는 홀로 별을 보는 日官이 된다.
할머닌 小盤에 새벽별 가득 이고 인두로 고이 누빈 베동정같은 반월성 고갯길을 걸어오신다.
그네 타고 계림숲을 떠오르면 흰 달빛 모시치마 홀로선 누님이여. 오늘밤 어머니도 첨성댈 낳고 나는 繡놓은 할머니의 첨성대가 되엇다. 할머니 눈물의 화강암이 되었다.
이별노래 저녁별 빈 손을 들고 무덤으로 간다 국화 몇 송이 문득 강가에 내던지고 오직 빈 손으로 저녁날 무덤가에 가서 마른 풀들의 가슴에 내 가슴을 묻는다 분노가 있어야 사랑은 있고 희망이 있어야 노래는 있는가 검정딱새 한 마리 내 뒤를 따라와 눈물의 붉은 비 거두어가고 어느덧 무덤가에 스치는 저녁별 정동진 밤을 다하여 우리가 태백을 넘어온 까닭은 무엇인가 밤을 다하여 우리가 새벽에 닿은 까닭은 무엇인가 수평선 너머로 우리가 타고 온 기차를 떠나보내고 우리는 각자 가슴을 맞대고 새벽 바다를 바라본다 해가 떠오른다 해는 바다 위로 막 떠오르는 순간에는 바라볼 수 있어도 성큼 떠오르고 나면 눈부셔 바라볼 수가 없다 그렇다 우리가 누가 누구의 해가 될 수 있겠는가 우리는 다만 서로의 햇살이 될 수 있을 뿐 우리는 다만 서로의 파도가 될 수 있을 뿐 누가 누구의 바다가 될 수 있겠는가 바다에 빠진 기차가 다시 일어나 해안선과 나란히 달린다 우리가 지금 다정하게 철길 옆 해변가로 팔장을 끼고 걷는다 해도 언제까지 함께 팔짱을 끼고 걸을 수 있겠는가 동해를 향해 서 있는 저 소나무를 보라 바다에 한쪽 어깨를 지친 듯이 내어준 저 소나무의 마음을 보라 내가 한때 긴 머리카락을 휘날리며 기대었던 그 어깨처럼 편안하지 않은가 또다시 해변을 따라 길게 벋어나간 저 철길을 보라 기차가 밤을 다하여 평생을 달려올 수 있었던 것은 서로 형행을 이루었기 때문이 아니겠는가 우리 굳이 하나가 되기 위하여 노력하기보다 평행을 이루어 우리의 기차를 달리게 해야 한다 기차를 떠나보내고 정동진은 늘 혼자 남는다 우리를 떠나보내고 정동진은 울지 않는다
정호승 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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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를 발견하는 기쁨" / 정호승 프란치스코
정호승 鄭浩承 (1950.1. 3 - )
1950년 경상남도 하동에서 태어나 대구에서 성장하였다.
대구 계성중학교와 대륜고등학교를 거쳐 경희대학교 국어국문학과와 경희대학교 대학원을 졸업하였다. 1972년 《한국일보》 신춘문예에 동시 〈석굴암을 오르는 영희〉로 당선되었고, 1973년 《대한일보》 신춘문예에 시 〈첨성대〉로 당선되었다. 1982년에는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단편소설 〈위령제〉로 당선되기도 하였다.
1976년 김명인, 김창완, 이동순 등과 함께 반시(反詩) 동인을 결성하여 활동하였고, 1979년 첫시집 《슬픔이 기쁨에게》를 출간하였다. 이후 시집 《서울의 예수》(1982)와 《새벽편지》(1987) 등을 통하여 1970년대와 1980년대 한국 사회의 그늘진 면을 따뜻한 시각으로 들여다보았다. 그는 암울한 분단상황에서 산업화 과정을 거치면서 정치적·경제적으로 소외된 사람들에 대한 애정을 슬프고도 따뜻한 시어들로 그려내었다. 《샘터》 편집부와 《월간조선》에서 근무하였고, 2000년 현대문학북스 대표가 되었다.
1989년 제3회 소월시문학상, 1997년 제10회 동서문학상을 수상하였고, 2000년 제12회 정지용문학상을 수상하였다.
그 밖의 주요 작품으로 시집 《별들은 따뜻하다》(1990), 《사랑하다가 죽어버려라》(1997), 《외로우니까 사람이다》(1998), 《눈물이 나면 기차를 타라》(1999), 시선집 《흔들리지 않는 갈대》(2000), 《내가 사랑하는 사람》(2000) 등이 있고, 수필집 《첫눈 오는 날 만나자》(1996)와 동화집 《에밀레종의 슬픔》 《바다로 날아간 까치》(1996), 《연인》(1998), 《항아리》(1999), 《모닥불》(2000), 장편소설 《서울에는 바다가 없다》(1993)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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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가 이야기
순결한 동심의 정서와 맑고 아름다운 서정의 결
평론가 하응백의 간명한 표현처럼 정호승은 '사랑'의 시인이다. 눈사람처럼 순백한, 그래서 눈사람과 사랑의 교감을 나눌 수 있을 정도로 순도 높은 서정 세계는 첫 시집 <슬픔이 기쁨에게>에서부터 다채롭게 펼쳐진다. 시인 특유의 순결한 동심의 정서가 맑고 아름다운 서정의 결을 일관되게 유지케 한다. 그렇다고 해서 그의 시는 값싼 감성을 자극하는 싸구려 산파극이나 요즘 베스트셀러 순위를 점령하고 있는 수많은 대중시와는 자못 다르다. 무엇보다도 그의 순정한 사랑과 동화적 시심의 뒤란에는 가난과 소외, 불행과 고통에 대한 동정과 타자에 대한 연민의 정서가 배음(背音)으로 깔려 있기 때문이다. 불행한 사람들의 영혼을 위무하고 그 생채기를 치료하는 어머니 젖가슴과 같은 '따뜻한 슬픔'!
두 번째 시집 <서울의 예수>에서도 사랑을 위한 기다림의 끈기를 계속해서 보여준다. "아직도 사랑할 자유밖에 없는/너희는 날마다 해 뜨는 곳에/그리움과 기다림의 씨를 뿌려라"('서울 복음 2'). 세 번째 시집 <새벽 편지>에서 시인의 사랑은 사회 전체로 확대 ·변주 ·일반화된다. 그는 전태일의 고귀한 희생을 진정으로 사랑하며, "허연 최루가스를 뒤집어쓰고/홀로 울고 있는 꽃다발 하나"('꽃다발')을 영전에 바친다. 네 번째 시집 <별들은 따뜻하다>에서 시인은 역사와 시대에 대한 좌절과 절망에서 촉발된 통렬한 자기 반성을 시작한다. 엇갈리는 사랑과 죽음을 동시에 노래하기 시작한 것이다. "내가 너를 사랑했을 때/너는 이미 숨져 있었고/네가 나를 사랑했을 때/나는 이미 숨져 있었다"('어떤 사랑').
이후 7년만에 상자한 다섯 번째 시집 <사랑하다가 죽어버려라>에서 시인은 사랑의 본성과 존재 원리에 대한 체득이 외로움과 숙명적으로 결합하여 우주적인 교감의 세계로 확산되는 새로운 면모를 보여주기 시작한다. 외로움이 내재된 슬픔 사랑을 그의 시적 영토로 이주시켜 다음 같은 절창을 낳는다. "울지 마라/외로우니까 사람이다/살아간다는 것은 외로움을 견디는 일이다/…/가끔은 하느님도 외로워서 눈물을 흘리신다"('수선화에게').
최근 시인은 <눈물이 나면 기차를 타라>를 간행했다. 사랑의 본질은 비움과 채움, 감춤과 드러냄의 끝임 없는 길항(拮抗)임을 간결한 시행에 담아 낸, 그야말로 이 시집에 진주처럼 박혀 있는 빛나는 소품 하나. "아무도 반달을 사랑하지 않는다면/반달이 보름달이 될 수 있겠는가/보름달이 반달이 되지 않는다면/사랑은 그 얼마나 오만할 것인가"('반달') 어쨌든, 그는 문학성과 대중성의 행복한 조화를 누리는 시인이다. (류신/문학평론가)
(정호승 시인 팬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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