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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1977.02.04 국문학자 양주동 박사 별세

서까래 2010. 3. 16. 23:13

1977.02.04  국문학자 양주동 박사 별세

 

 

‘우리 겨레가 워낙 낙천적인 농업 국민으로서 노상 웃음을 띠는 갸륵한 민족성을 가졌거니와, 나는 그러한 겨레의 후예로서도 특히 웃음을 더 많이 물려받아, 내 자신 웃기를 무척 좋아하고 남이 웃는 것을 사뭇 즐기고 축복하는 자이다.’(수필 ‘웃음설’)

1977년 2월 4일, 자칭 ‘인간 국보()’이자 ‘소권(·웃을 권리) 옹호론자’인 무애 양주동( ) 박사가 세상을 떠났다. 그는 당대 최고의 국문학자이자 수필가였고, 라디오 토크쇼 고정출연자로 전 국민에게 친숙했던 대중적 지식인이었다.

그의 천재성은 자타가 인정했다. 20대에 영문학을 전공해 번역가로 이름을 날리면서 시인으로서도 문재()를 뽐냈다. 30대에 불현듯 신라 향가를 파고들더니 40세에 불후의 명저 ‘조선고가연구’를 펴냈다. ‘나실 제 괴로움 다 잊으시고’로 시작되는 어머니 노래가 그의 시요, 뭇 고교생이 달달 외웠던 ‘찬기파랑가’가 그의 해독이다.

천재성의 바탕에는 천진난만한 학구열이 있었다. 영문법을 독학하다가 ‘3인칭’이란 단어가 막히자 30리를 걸어 읍내 선생님을 찾았더랬다. 설명을 듣고 희열에 들떠 “내가 1인칭, 너는 2인칭, 그 외엔 우수마발()이 다 3인칭이니라”고 외치고 다녔다는 이야기(수필 ‘면학의 서’)에는 흐뭇한 미소가 깃든다. ‘기하’(·도형과 공간을 연구하는 수학부문)의 한자를 뜻풀이하면 ‘몇 어찌’인데 도대체 무슨 말인지 난감했다는 회고(수필 ‘몇 어찌’)에서는 똘망똘망 눈망울을 굴리는 학동이 떠오른다.

그 천진난만함은 웃음과 한몸이다. 부의금 챙기기에 여념이 없던 상주()가 틈만 나면 ‘유장한 베이스’로 ‘아이고, 아이고’ 곡을 하더란다. 그 모습이 하도 우스워 상가에서 껄껄 웃다가 쫓겨났다는 일화(수필 ‘웃음설’)는 가히 블랙코미디다.

육당 최남선( )이 ‘100년 뒤 남을 한 권의 책’이라고 극찬했던 그의 ‘조선고가연구’도 이제는 후학들의 도전을 받고 있다. 저승의 양 박사는 과연 노여워하고 있을까? 아닐 것이다. 후학들의 꿈에 나타나 “그래, 너는 국보 2호 해라”라며 껄껄 웃는 것이 그의 풍모에 걸맞다.

 

양주동[ 梁柱東 ]

 

1903. 6. 24 경기 개성~1977.

시인·문학평론가·국문학자

본관은 남해. 호는 무애(无涯).

 

아버지 원장(元章)과 어머니 강릉김씨(江陵金氏) 사이에서 태어나 6세 때 아버지, 12세 때 어머니를 여의었다. 평양고등보통학교에 진학했으나 곧 중퇴하고 고향에 돌아가 5~6년간 한학에 몰두했다. 1920년 상경해 중동학교 고등속성과를 졸업한 후 이듬해 일본으로 건너가 와세다대학[早稻田大學] 예과에 입학하면서 문학에 뜻을 두었다. 1923년 잠시 귀국하여 유엽·백기만·이장희 등과 함께 〈금성〉을 발간하고 본격적인 문학활동을 시작했다. 와세다대학 영문과를 졸업한 후 평양숭실전문학교 교수로 부임했다가 일제 말기에 학교가 문을 닫자 경신학교 교사로 근무했다. 1929년 염상섭과 함께 순문예지 〈문예공론〉을 펴냈고, 1930년대에는 시 창작과 외국시 번역 소개, 문학비평, 고전문학 연구 등에 걸쳐 폭넓게 활동했다. 해방 후에는 동국대학교·연세대학교 교수를 지냈고, 1957년 연세대에서 명예문학박사학위를 받았다. 1954년부터 죽을 때까지 대한민국 예술원 회원으로 있었다.

 

출처 : 추억속으로
글쓴이 : 그림자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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