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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어보아요/좋은 글과 시

登黃鶴樓 (등황학루) 崔顥(최호)

서까래 2010. 3. 31. 20:59

黃鶴樓 - 崔顥

                                             황학루도 - 원나라 화가 하영 

  

 

登黃鶴樓   - 崔顥 (704-754)

 

人已乘黃鶴去 /석인이승황학거

此地空餘黃鶴樓 /차지공여황학루

黃鶴一去不復返 /황학일거불부반

白雲千載空悠悠 /백운천재공유유

晴川歷歷漢陽樹 /청천력력한양수

芳草萋萋鸚鵡州 /방초처처앵무주

日暮鄕關何處是 /일모향관하처시

烟波江上使人愁 /연파강상사인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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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사람은 황학을 타고 가버리니

이 땅에는 헛되이 황학루만 남았구나

황학은 한번가고 돌아올 줄 모르고

흰 구름만 천년을 부질없이 흘렀나니

내 건너 한양의 나무들 개인하늘에 역력하고

봄풀 무성한 저곳은 앵무주가 아니 더냐

해 저무는 하늘아래 내 고향은 어디 멘가

안개 옅은 저녁 강은 시름 젖게 하는 구나

 


崔顥(704?~754) 당의 변주(河南) 사람,

젊어서는 賭博(도박)을 즐겼고,

酒色(주색)에 깊어 詩도 輕薄(경박)하였는데,

만년에 風骨(풍골)이 뛰어난 시를 지었다.

官은 司勳員外郞(사훈원외랑).

시집1권이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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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詩는 그야말로 絶唱(절창)이라해도 손색이 없는

唐詩(당시)의 白眉(백미)라 할 수 있다.

그 構成(구성)과 修辭(수사) 등을 본 이태백은 이후도

이와 같은 시는 아무도 지을 수 없다고 탄복하고

黃鶴樓(황학루)에서 詩를 짓기를 포기했다고 한다.

그리고 봉황대로 가서 이시와 필적할 絶唱 登金陵鳳凰臺를 지었다고 한다.


그시절 이곳에 辛씨의 酒幕(주막)이 있었는데 한 道人이 와서

술값대신 술집 벽에 鶴(학)을 한 마리 그려주고 학이 내려와 도와줄 것 이라고 했다.

그 후 이 주점은 門前成市를 이루었는데 10년후 그 도인이

나타나 피리를 불며 벽속의 황학을 타고 선계로 올라갔다한다.

 

신씨는 그곳에 황학루를 지었다고 전한다.

중국 강남의 3대 누각은 악양의 岳陽樓(악양루)

남청의 騰王閣(등왕각) 무한의 黃鶴樓를 꼽는다.

이후 李太白은 이곳을 들려 2미터가 넘는 큰 碑石에 글을남겼는데,

壯觀(장관) 오직 단 두자 라고 한다 더 할 말이 없다는 뜻이다.

 

黃鶴樓는 오층의 전각으로 鶴이 나는 듯한 처마 끝과

20미터가 훌쩍 넘는 대규모의 전각으로 높은 바위위에

세워져 그 위용이 가히 凜凜(늠름)하다.


首聯(수련)의 전설의 仙人(선인)에 대한 憧憬(동경)과

頸聯(경련)의 그것이 부질없음을 한편 구름에 物托(물탁)하고

頷聯 尾聯(함련 미련)에서는 一轉(일전)하여 저무는 江上(강상)에서

나그네 시름을 述懷(술회)했다.

 

정말 보기 드문 秀作(수작)이다

                                                                     

 

 湖北省   武漢    黃鶴樓

 

 

 

 

黄鹤楼  :晏菲.wma (1314kb)     다운로드

 

황학루에 얽힌 사연..

 

먼 옛날 한 여인이
경치 좋은 이곳에서
주점을 열었단다.

한 노인이 돈도 없이
여러 달 술을 마셨고
후덕한 주모는
말없이 잘 대접했다.

그러던 어느 날
노인은 귤껍질을 가지고
벽에 누런 학을 그려놓고 떠났다.

그 후로
술자리가 벌어질 때마다
벽에 그려진 학이
춤을 추어서 손님이 모여들었다.

10년이 지나
큰돈을 벌은 후에
노인이 다시 나타나서
피리를 불며 자기가 그렸던
황학을 타고 하늘로 올라갔는데,

그 노인은
자안(子安)이라는
신선이었다고 전한다.

큰돈을 번 여인은
신선을 기려
그 자리에 정자를 짓고
황학정이라 했다는데,

이러한 고사와
경치가 어우러져
많은 시인들을 불렀고
그 중에서도 최호의
"황학루"가
단연 백미라고 한다. 

수 많은 시인들이
이 작품을 흉내 내어 시를 지었지만
이 작품을 능가할 수 없었다고 한다.

특히 이백(李白)도
"등금릉봉황대"라는
작품을 지었으나
만족하지 못했다고 한다.

그 후에 이백이 이곳에 들러
최호의 시를 보고는
천하명시라고 격찬하고
이보다 더 좋은 시는
지을 수 없다 하여 붓을 꺾었단다.

그래서 황학루의
최호시비(崔顥詩碑) 옆에는
이백이 붓을 꺾었다는
각필정(擱筆亭)이 서 있고,

그래도 그 유명한 황학루에
시 한수 남기지 못한 것이 서운했던지
후일 다시 와서 앵무주라는
시 한 수를 읊고 붓을 씻었다하여
세필지(洗筆池)라는 연못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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