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두들 혀 내두르는 이야기꾼… 이들이 '조선 3대 구라'
방동규 : 입담좋은 옛날주먹…"말만 잘해선 안돼"
황석영 : 문단 최고… "누구나 오늘을 사는거야"
문단의 대선배인 황석영 선생을 우리들은 당신이 없는 자리에서 감히 이렇게 부른다. '황구라!' 우리나라에는 황구라와 더불어 방구라, 백구라가 있다. 이 세 명은 그 이름만으로도 강력한 울림이 있는 우리 시대의 정신이기도 하다. 방구라는 방배추로 더 널리 알려진 방동규 선생, 백구라는 백기완 선생이다. 조선의 3대 구라이다.
조선의 선비 정신인 퇴계나 율곡 같은 울림이 있는 구라, 이 시대를 대변하는 또 다른 호인 '구라'. 어떤 이는 이분들을 조선의 3대 라지오(라디오)라고도 부른다. '라지오'가 어느 지방의 방언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하여간 라디오라고 하면 오기다. '라지오'라고 해야 의미 전달이 잘된다. 그럼 '구라'와 '라지오'는 무엇인가? 황석영 선생과 방배추 선생이 술자리에서 이런 대화를 나누었다.
황: 저 형, 요즘에 우리들을 위협하는 신진 '라지오'들이 밀려오고 있습니다.
방: 그래. 야, 그런 일이 있어. 그게 누군데? 이름 한번 불어 보라.
황: 유홍준이, 도올, 그리고 이어령 교수지요.
방: 야야, 갸들이 무슨 라지오야. 인생이 없는데. 갸들은 그냥 교육방송이야. 뭐 3대 교육방송으로 하면 되갔구먼.
황 선생이 언급한 존경 받는 우리 시대의 3대 지성을 단박에 3대 교육방송으로 지정해버리는 방구라의 순발력, 과연 구라는 구라다 싶다. 이분들은 교육적인 분들임으로 뭐 그리 틀린 것 같지는 않다. 이 구라를 곱씹어 보면 라지오의 의미가 파악된다.
'라지오'에게는 3대 조건이 있어야 한다. 뭐 좀 안다고, 입술을 나불거린다고 라지오가 되는 게 아니다. 콘텐츠가 꽉 찬 방송처럼, 일단은 남다른 인생이 있어야 한다. 인생이란 무엇인가? 백·방·황 삼대 구라의 인생 정도는 되어야 한다는 이야기다. 두 번째가 지성이다. 뭘 알아야 된다. 세 번째가 남다른 경륜이다.
이들이 이 '구라의 조건'을 갖추기 위해서는 그 시대가 각별했다. 전쟁과 분단이 있고, 잔인한 슬픔이 있고, 가슴 찢어지는 이별과 회환이 사무쳐 있다. 방 선생이 설파한 인생이란 그런 인생이다.
우선 '황구라'를 보자. 황 선생은 방북·망명·투옥 등으로 15년의 인생을 살았다. 작가로서 가장 왕성하게 활동하고 돈 벌고, 상 받고 하는 그런 세월을 그는 단 한 편의 소설을 쓰지 못했다. 그냥 살아냈다.
방북하기 전, 그는 이미 '장길산'과 '삼포 가는 길'과 같은 작품으로 소설가로서 탄탄대로를 걷고 있었다. 선생이 수감생활을 하는 동안 '황석영은 이제 갔다'라는 말도 유령처럼 떠돌았다. 15년간을 그렇게 보냈으니 뭐 그런 추문이 돌 만도 하다. 하지만 지금 황석영은 포스가 강한 문단의 어른이면서 동시에 베스트셀러 작가이다. 황구라의 저력을 잘 대변하는 구라가 있다.
"사람은 씨팔, 누구든 오늘을 사는 거야!"
어떤 이는 황구라 최고의 구라가 바로 이 문장이라고 했다. 그는 어제의 고통으로 시간낭비 하지 않는다. 어제의 슬픔으로 오늘을 눈물 흘리지 않는다. 오로지 오늘을 산다. 그에게 어제를 이야기할 오늘은 없다. 오늘을 진정으로 살아낸 사람은 진정으로 아름다워라.
그럼 백구라는 어떤 구라인가? 백 선생의 구라는 장엄한 백두산과 같은 포부와 도도히 흐르는 한강 물줄기와 같은 깊이가 있다. 백 선생이 스물한 살 시절, 스무 살의 방 선생을 만났다. 이 상황은 '배추가 돌아왔다' 39쪽에 잘 정리되어 있는데 그 문장을 인용하는 대신에 내가 술자리에서 어떤 이에게 전해들은 구라를 그대로 적어보자. 당시 '방구라'는 짱이었고, 주먹으로 자신의 '나와바리'를 다스리고 있던 시절이었다.
백: 자네 주먹 좀 쓴다고 하던데 몇 명이나 상대할 수 있나?
방: 뭐 그저 한 삼십 명 정도는…
그때 백이 벌떡 일어나 방의 '싸대기'를 올려 붙였다. 주먹 제일 방구라는 어이가 없었다. 피죽도 못 끓여 먹은 것 같은 파리한 지식인 청년 백기완은 그야말로 한주먹감도 안 되었기 때문이다. 이게 도대체 어떤 시추에이션인가 싶어 방구라가 잠시 어리둥절하고 있자 백구라가 천천히 앉으면서 말했다.
백: 사내로 태어났으면 삼천 명이나 삼만 명은 상대해야지 겨우 삼십 명이야. 에이, 너 다시는 내 앞에 나타나지마. 어서 썩 꺼져.
백 선생 역시 방 선생의 그릇됨을 바라보고 그런 언행을 하신 것은 아닐까 싶다. 동네 양아치에게 그렇게 했다가는 시쳇말로 뼈도 못 추릴 수 있기 때문이다. 부처와 가섭의 염화미소, 선불교에서 임제선사가 스승인 황벽 선사에 3번이나 '싸대기'를 맞고서야 깨달은 '거시기'와 같은 구라였다. 백 선생이 황벽 선사의 흉내를 낸 것인지는 내 알 수 없는 일이지만, 대장부끼리의 이러한 구라는 이제는 전설 따라 삼천리가 되어버린 일들이다. 한 시절 당대의 민족 방송, 민중의 '라지오'인 백기완 선생은 그 장대한 구라로 일세를 풍미했다.
"석영아 들어라. 저 드넓은 만주 벌판의 우리 여인네들이 한번 월경을 하면, 그 설원이 모두 장엄하게 핏빛으로 물들었도다."
한마디로 백 선생의 구라는 민족적이고, 지금은 사라진 수컷들, 대장부의 기개가 넘치는 민중의 방송이었다. 우리 어린 것들은 백 선생의 그러한 구라 밑에서 다 꺼져가는 의협심의 불씨를 다시 지피곤 하였다.
백 선생의 전설적인 구라는 히딩크라는 네덜란드의 라지오, 즉 구라를 감복시켰다. 2002년 월드컵 국가대표팀의 정신교육 강연이 있었다. 그 자리에서 그는 조선 범의 기상을 선수들에게 불어 넣어주었다. 세계적으로 보기 드물게 강인한 조선 범처럼 뛰어라. 그 강연 덕분이었는지 모를 일이지만, 그때 우리 선수들은 조선 범의 기상으로 뛰고, 차고, 날랐다.
그리고 그 여세를 몰아 히딩크는 월드컵 4강 신화를 이룩했다. 히딩크 역시 만만치 않은 구라다. '나는 아직도 배가 고프다'와 같은 절묘한 구라로 우리 국민들의 축구 한을 풀어 주었으니, 히딩크를 조선 구라 반열에 넣어도 되지 않을까 싶다. 히딩크 는 백기완 선생을 자신이 제일 존경하는 한국인으로 손꼽았다. 선수는 선수를 알아보는 법이다.
어느 해이던가, 연말 모임에서 황석영 선생이 이제 환갑을 맞아 우리들에게 마지막 구라를 터뜨린 적이 있다. 일본 여인의 신음소리와 요코하마 항구의 뱃고동소리가 울려 퍼지는 남녀 운우지정의 카세트 테이프였다. 이제 그 음란 방송은 사모님의 간곡한 부탁 '이제 당신도 환갑인데 그런 건 좀…'으로 그 날이 마지막이었다. 이렇게 하나, 둘 우리 곁에서 사라지는 구라가 있다.
말은 글이 아니다. 글은 말이 아니다. 글은 눈으로 읽어서 느낀다. 하지만 말은 귀와 온몸으로 스며들어 심장을 터트린다. 그래서 '근사한 구라'는 예술이다.
한편 구라는 독일의 히틀러를 만들어 냈고, 미국의 링컨을 만들어 냈다. 그리고 요즘 뜨고 있는 오바마도 만들어 낸다. '근사한' 구라는 감동과 몸 울림이 있었다. 그 감동을 생방송으로 아주 조금이라도 들은 나는 행복한 사람이다. 오늘, 문득 고개를 들어 보니 작업실에 난이 꽃을 피웠다. 난은 고통스러울 때 꽃을 피운다는 구라가 있다. 지금 저 난이 나에게 어떤 구라를 꽃 터뜨리는 것인가. "너도 언젠가는 절창을 터뜨릴 날이 있을 거다" 라는 '황구라'가 꽃 떨림으로 문득 다가왔다.
원재훈 시인의 <모두들 혀 내두르는 이야기꾼… 이들이 '조선 3대 구라>에서 인용함
이미 신문을 통해 보신 분들이 많으시겠지만 '조선 3대 구라'이야기, 혹 모르실 분들을 위해 다시 올려 보았습니다.
이 시대는 이들을 보내면 다시 이런 '구라'들을 잉태 할 여건이 안 돼는 것 같아 안타깝습니다.
이제는 더 이상 단기필마로 실력을 펼쳐 무림을 평정하고자 고수들을 찾아 헤매는 시대, 황야의 이리들의 시대는 아닌가 봅니다.
이 시대는 그저 임꺽정의 '서림'이 정도나 되는 서생들이나 바글거리는 것이 아닐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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