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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剛山도 息後景 - 풀잎처럼 눕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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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山처럼 江처럼 산 세월…문득 詩가 내게로 왔다 - 김용택

서까래 2010. 1. 18. 22:45
해가 지고 있다. 학교 뒷산 너머로 5월의 맑은 해가 진다. 해가 지면 산이 그늘을 내린다. 산그늘은 내리면서 5월의 푸른 산을 덮고, 산과 밭에 있는 감나무를 산그늘에 세워두고 학교 교실 뒤로 내려와서 교실을 덮고 운동장을 지나간다.
  아이들이 산그늘에 쫓겨 집으로 간다. 학교를 다 덮은 산그늘은 강변에 핀 붉은 자운영꽃을 되살려 놓고 강을 건너 마을을 지나 산을, 앞산을 넘어 가버린다.
  오! 이제 세상은 산그늘이 만들어낸 푸른 어둠으로 잔뜩 긴장된다. 풀잎과 풀잎 사이, 나무와 나무 사이, 산과 산 사이를 나는 지나간다.
  그 푸른 어둠의 긴장을 뚫고, 그 푸른 어둠을 가르며 나는 간다. 그랬다. 내 문학은 해 저문 저 배고픈 푸른 들길에서 시작되었다. 푸른 어둠에서 캄캄한 어둠으로 건너가는 저 숨막히는 자연의 긴장 속에 나는, 내 문학은 있었다.
 
  스물한 살이 되던 해 나는 한 산골의 초등학교 교사가 되어 있었다. 태어나 한 번도 상상해보지 않았던 일이 내게 벌어진 것이다. 이 느닷없는 삶의 전환은 나를 어리둥절하게 했다. 싱그러운 스물한 살의 팽팽한 젊음은 그러나 산골 아이들 앞에서 너무나 심심했다. 까만 머리통의 아이들과 작은 들과 산은 내게 무료했고, 너무나 적막했다.
  아무도 가르쳐주지 않은 길
  그렇게 몇 개월을 심심하게 보내고 있는데, 그 먼 산골까지 책을 월부로 파는 사람이 나타났다. 내가 처음으로 내 돈을 주고 산 책은 ‘도스토예프스키 전집’이었다.
  겨울방학이 시작되고 나는 낮에는 동무들과 산에 나무 가고, 밤에는 도스토예프스키에 매달려 밤을 하얗게 지새우곤 했다. 그 해는 눈도 많이 왔다. 세상 가득 눈이 온 날 아침 나는 아직 아무도 가지 않은 징검다리 위의 눈을 밟으며 강을 건너갔다 왔다.
  겨울방학이 그렇게 끝나자 나는 전집 여섯 권을 거의 다 읽고 있었다. 학교로 가기 위해 차를 타러 마을 밖으로 나가는 길은 그러나 내게 전혀 새로운 길이었다. 산과 들과 나무와 길과 사람들이 사는 마을과 내 걸음걸이가 방학 전의 것들이 아니었다. 뒷산에 있는 느티나무가 그렇게 큰 줄 나는 그때야 알았다.
  앞산 산등성이를 비껴오는 아침 햇살은 눈부셨고, 산굽이를 돌아가는 아침 강물 소리는 새로웠다. 세상은 내게 그렇게 새로운 모습으로 다가왔던 것이다. 신비롭던 그때를 떠올리면 나는 지금도 눈부시다.
 
  그리고 나는 그때부터 책을 읽기 시작했다. ‘박목월 전집’ ‘이어령 전집’ ‘니체 전집’ 그리고 한국문학 50권짜리 전집도 그때 읽었다.
  아무도 그 누구도 가르쳐주지 않은 전혀 낯선, 그러나 그 어디에선가 보았던 것 같은 그 샛길에서 나는 비로소 나를 만났다. 나는 날마다 나를 응시하고, 나를 신기해 했다. 늘 버리고, 무엇인가 설레는 그 무엇을 새로 얻었다.
  그리고 나는 평생 농사를 짓고 사는 우리 아버지와 어머니를 보았다. 그분들의 아침과 그분들의 일과 놀이를 나는 보았다. 한 동네에서 태어나 자라 그 동네에서 살다 죽어 그 동네 산에 묻히는 농부들의 삶은 내게 아름다운 모습이었다.
  그리고 나는 마을과 내가 사는 이 나라와 세계를 이해하기 시작했다. 아무도 가르쳐주지 않았으므로 나는 늘 새날이었다. 그런 날들이 지나고, 그런 생각들이 쌓였다. 늘 죽고 늘 태어났다. 사사로운 나의 가치들이 폐기되고 아름다운 공통의 가치가 내 속에 찾아와 자리를 잡아갔다.
  그렇게 5, 6년 지난 어느날 아침 나는 마루에서 뚤방으로 내려섰다. 뚤방 시멘트 바닥에 무엇이 떨어졌다. 코피였다. 고개를 뒤로 젖혔다. 목구멍을 타고 들어가던 달짝지근한 것, 그것, 그랬다. 내 것이 나의 목마름을 적셔주었던 것이다.
 
  어느날 나는 방에 누워 멀거니 여기저기 쌓인 책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놀랐다. 그렇구나. 저 책을 사람들이 쓴 것이로구나. 그래, 맞아. 나도 글을 써 보아야지. 그리고 나는 글을 써 보기 시작했다. 그것이 내 글쓰기의 시작이었다.
  나는 외로웠다. 내겐 아무도 없었다. 친구도 스승도 문학을 이야기할 그 누구도 내겐 없었다. 오직 나는 스스로 묻고 스스로 대답하면서 나를 키워갔다. 그렇게 13년이 흘러갔다. 그 길고 긴 세월, 내가 제일 못견뎌한 것은 저 봄날의 저묾이었다. 산그늘에 덮인 나무와 나무 사이의 그 팽팽한 긴장 때문에 나는 숨이 멎을 것 같았다.
  그 긴장을 뚫고 나는 나무 사이를 지나다녔다. 어둠이 내려오는 뒷산을 오르며, 흰 산꽃들을 보았다. 그리고 내가 또 못견뎌했던 것은 창호지 문에 새어든 달빛이었다. 달이 뜬 봄밤이면 나는 툇마루에 나가 달을 보며 많은 시간을 보냈다.
  달빛이 수시로 나를 불러내면 나는 징검다리 돌들을 세며 강물을 건너갔다. 달빛에 빛나는 검은 바위들과 밤이슬에 반짝이는 풀잎들. 달은 나를 두고 그렇게 갔다.
 
  스스로 묻고 스스로 대답
  그 긴장된 푸른 어둠 속 풀꽃들의 서늘한 아름다움을 견딜 수 있고, 빈 방을 찾아온 달빛을 견딜 수 있는 유일한 길은 글을 쓰는 일이었다. 힘이 들었다. 절망은 예고도 없이 수시로 나를 찾아왔고, 나는 어두운 저 절망의 나락 속에서 한 줄기 불빛을 살려내곤 했는데, 그것이 시였다.
  어두운 땅 속에 묻힌 무가 빛을 찾아 노란 싹을 키우듯이 나도 그렇게 시의 빛을 찾아 어둠 속에서 내 생명의 싹을 길렀다. 해가 저물면 나는 강변을 헤매거나, 들길을 바라보고 서 있었다. 밤이 되면 일어서는 막막한 산. 산을 감고 돌아가는, 달빛 받은 강물.
  그렇게 내가 산과 강에 내 몸을 모두 기대고 살기를 13년, 어느날 시가 내게로 왔다. 어두운 산에서였는지 아니면 흐르는 강물 그 어느 굽이에서였는지, 내게로 시가 왔던 것이다. 내 몸이 환해지는 시, 암울한 내 청춘의 어둠 속을 뚫고 달려왔던 한 줄기 불빛 같은 시, 세상을 알아낸 것 같은 시, 시가 내게로 왔던 것이다. 그때 내 나이 서른 다섯 살이었다.
 
  나는 솔직히 말해서 내가 왜 문학을 하는가에 대해 한번도 생각해 보지 않았다. 나는 다만 살 뿐이다. 내가 살고 있는 섬진강 가 이 보잘 것 없는 작은 마을에 태어나 나는 이 곳의 모든 자연들과 갈등하고 화해하며 살았다. 나무가 나무로 보이고, 산이 산으로 보이고, 소쩍새 소리가 소쩍새 소리로 들리기까지 내가 겪은 수많은 날들이 나를 시인이게 했다.
  시인? 글쎄, 내가 시인인지 나는 잘 모르겠다. 시가 이 세상 그 어디에, 그 무엇에, 그 누군가에게 그 무엇이 되는지 나는 아직 잘 모른다. 다만 나는 내가 태어나 자란 땅을 노래해 왔다.
  세상에 태어나 사람이 바람 같은 인생을 살아가는데, 나는 바람결에 스치는 풀잎일뿐이라는 생각을 하며 살았다. 인생, 그 얼마나 하찮고 보잘 것 없는가. 도대체 우리들 삶이 그 무엇을 이룬단 말인가. 우리들이 사는 이 세상은 지금 행복한가. 나는 잘 살고 있는가.
 
  언제나 새로운 자연
  나는 사랑한다. 나를, 그리고 내가 태어나 걸었던 강길과 그 길에서 만난 풀과 나무와 봄과 여름의 풀꽃들과 비오는 산과 눈이 내리는 강물과 몸을 다 눕히는 봄 풀잎들, 새로 잎 피는 나무와 노을이 져버린 겨울 강가에 떠 있는 하얀 억새들, 멀리 날아가는 새와 그 속에 허리 굽혀 땅에 씨를 뿌리고 농사를 짓고 사는 농부들을 나는 노래해 왔다.
  그리고 그 길 끝에 내 생의 아름다움을 가꾸어 주는 꽃보다 아름다운 아이들이 있었다. 나는 거기, 지금도 있는 거기가 늘 빛나는 내 현실이 되기를 바랐고, 또 그렇게 되었다.
  나는 복을 타고난 사람이다. 늘 보던 산과 물이지만 늘 새로운 감동으로 다가오는 자연과 그리도 하얀 운동장에 나뭇잎 같은 아이들, 오! 그리고 무엇보다도 거기에는 시가 있었다. 내 몸을 빛내주는 시, 내 암울한 청춘을 훤하게 뚫고 지나온 그 빛나는 시, 누구도 못 말리는 사랑과 자유, 그리고 끝이 없을 것 같은 이 정신의 풍요로움.
  나는 지금도 내 의지와 열정으로 충만한 삶을 살고 싶다. 사랑하고 감동하고 희구하고 전율하며 사는 것이다. 로댕의 말이다.
 
  문학을 왜 하는가? 살아야지. 죽어도 괜찮다는 하루를 나는 그냥 살 뿐이다. 문학은 최고의 삶을 사는 일이다.
 
 
  - 한국일보 [나는 왜 문학을 하는가] 2002/05/16 -

출처 : 두꺼운 연습공책
글쓴이 : 퍼플캣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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