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간시평/지난 계절의 좋은 시 읽기
풀잎에 맺혀있는 작은 물방울을 바라보면 그 속에 눈빛이 있고 그 눈빛은 투명한 눈이면서 동시에 몸이라는 것을 느끼게 된다. 우리 눈에 그것은 하찮은 작은 물방울에 지나지 않지만, 자세히 보면 그 자체가 우주이고 살아서 꿈틀거리는 유기체인 것이다. 시 역시 물방울처럼 이목구비를 지니고 있는 우주이다. 물방울이 동그랗고 투명한 눈으로 세계를 바라보듯 시 역시 시만의 눈으로 세계를 바라보고 대화하고 소통한다. 시는 시의 눈으로 세계를 보고 세계는 세계의 눈으로 시를 본다. 이처럼 세계와 시는 끊임없이 소통하면서 우리 앞에 존재한다. 시가 시의 눈으로 세계를 바라볼 때 시의 눈이 강조되지만, 세계가 세계의 눈으로 시를 바라볼 때 시의 몸이 강조된다. 여기서의 세계는 다른 말로 말하면 시의 밖에 존재하는 또 다른 '타자'이다. 우리가 시를 읽을 때 종종 우리는 시의 밖에 존재하는 타자가 되어 시를 읽는다. 이 때 세계와 소통의 통로를 가지고 있는 시들은 우리에게 투명하게 읽히고 그렇지 않은 시들은 불투명하고 난해하게 읽힌다.
한편, 우리는 종종 시의 눈을 가지고 시를 읽고 세상을 읽기도 한다. 여기서의 '시의 눈'은 흔히 우리가 말하는 시안(詩眼)으로 풀이할 수도 있지만, 중국 고전 시학에서 유래한 '시안(詩眼)'의 본래적 의미는 시 스스로가 지니고 있는 존재의 눈이라기보다는, 우리가 시를 쓸 때 언어의 표현에서 가장 핵심적인 부분, 다시 말하면 시의 생명력이 응집된, 시 전체를 빛나게 하는 시어나 시구를 의미한다. 말하자면 화룡점정의 '용의 눈'과 같은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런데 현대시에서 쓰이는 '시안'은 이러한 좁은 뜻에서 벗어나서 '좋은 시를 읽어내는 눈' 혹은 '관습적 세상과 구별되는 시인의 눈 또는 시의 눈'으로 종종 읽히고 있다. 필자가 이 글에서 사용하려는 '시의 눈'은 후자에 가깝다. 그러므로 여기서의 '시의 눈'은 일상적 세상의 눈과 구별되는 '시인만의 독특한 눈'을 의미하면서 동시에 '시 자체가 지니고 있는 눈'으로서의 이중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시의 눈'은 잠자리의 눈과 같은 '겹눈'이다. 다음의 시는 이러한 '시의 눈'에 대한 사유를 간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시에는 눈이 있다
언제나 이쪽은 보지 않고 저쪽
보이지 않는 그쪽만 본다.
가고있는 사람의 발자국은 보지 않고
돌에 박힌
가지 않는 사람의 발자국만 본다.
바람에 슬리며 바람을 달래며
한 송이 꽃이 피어난다.
루오할아버지가 그린 예수의 얼굴처럼
윤곽만 있고 耳目口鼻가 없다.
그걸 바라보는 조금 갈색진 눈,
슬프디 슬픈 시의 눈,
―김춘수,「詩眼」전문(『시안』2003년 겨울호)
인용 시에서 시적 화자는 시에도 눈이 있다고 말한다. 그런데 시의 내용을 읽어보면 '시의 눈'은 일상적인 사람의 눈과는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시의 눈은 언제나 '저쪽'만 보는 눈이고, "가지 않는 사람의 발자국"만 보고, 이목구비는 없고 윤곽만 있는 루오 할아버지가 그린 예수의 얼굴을 보듯, 사물의 '윤곽'만 보는 특이한 눈이다. 좀더 이 시를 풀이하자면, 시의 눈은 사물의 '이쪽'보다는 '저쪽' 즉 사물의 이면을 보고, 그 이면에 찍혀있는 "가지 않는 사람의 발자국"을 본다. 그리고 시인이 이 시에서 말하고 있는 이목구비가 없는 윤곽만 있는 얼굴이란 일상적인 얼굴을 넘어선, 시적으로 변용된 얼굴을 의미한다. 그런데 이런 시의 눈앞에서 한송이 꽃이 피어난다. 그 꽃은 "바람에 슬리며 바람을 달래며" 피는 꽃이다. 여기서 바람에 슬린다는 것은 피동적 주체로서의 의미를 나타내며 바람을 달랜다는 것은 반대로 능동적인 주체로서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 다시 말하면 시는 시의 눈을 가지고 세상을 바라보기 이전에 꽃으로 피어나는 자신의 존재를 보고 있는 것이다. 일찍이 시 자체로서의 존재시학을 펼쳐 보여준 바 있는 김춘수 시인다운 발상이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하나밖에 없는 뿔
자랑 마라
뿔없는 나도 하나밖에 없다
언제부턴가 나는
마음속 허공 내려놓고
모든 그림자 들이박는
힘센 뿔 하나 갖고 싶었다
뿔이 있다면
무엇이든 들이박고 싶은 때가
나에게도 있었다 아마 너에게도
그때 너가
나에게로 왔다
아무데나 가지 않고
아무데서나 숙이지 않는
무소의 뿔처럼 홀로
―천양희, 「詩」(『한국문학』2003년 겨울호)
이 시는 김춘수의 「詩眼」과는 또 다른 관점에서 시와 시인 자신을 바라보고 있다. 여기서의 시와 시인은 어떤 '관계'속에 놓여있다. 그것은 단적으로 말하면 존재론적 관계이다. 시인은 시에게 말한다. "하나밖에 없는 뿔/ 자랑 마라"고. 시인은 자신이 뿔이 없다는 것 때문에 몹시 뿔을 가지고 싶어하지만, 동시에 "뿔없는 나" 즉 자신의 고유한 존재성을 망각하지 않고 있다. 그런데 뿔을 열망하던 시인에게 뿔인 시가 오게 됨으로서 시인은 비로소 시인이 된다. 여기서의 시는 하나밖에 없는 뿔을 가지고 있는 존재이지만, 그 자신이 뿔이 되어 시인에게 왔다는 점에서 몸 전체가 뿔인 독특한 존재인 것이다. 비로소 시인은 "아무데나 가지 않고/아무데서나 숙이지 않는/ 무소의 뿔"같은 시의 뿔을 지니게 된 것이다. 하지만 여기서의 뿔은 우리가 일상적으로 느끼는 무기로서의 뿔이 아니다. 즉 시의 뿔은 "마음의 허공 내려놓고/모든 그림자 들이받는" 뿔이다. 이 시의 '그림자'가 김춘수의 시에서 '윤곽'과 같은 맥락에서 읽히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다. 즉 천양희의 '시의 뿔'은 다른 말로 말하면 '시의 눈'인 셈이다. 그러므로 시인은 시의 뿔, 즉 시의 눈을 가질 때에야 비로소 진정한 시인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이처럼 '시의 눈'은 시인에게 있어서 필수불가결한 요소이다. 하지만 시에는 눈만 있는 것이 아니라 육체성으로서의 '시의 몸'이 있다. 시인은 시의 눈으로 세상과 자신을 바라볼 뿐만 아니라, 시의 몸, 즉 육체성을 지닌 시로서의 대상도 찾아낼 수 있어야 한다. 최근의 정진규 시인의 「몸詩」연작에서 보듯, 현대시에서 육체성으로서의 '몸'은 점점 더 강조되고 있는 추세이다. 인간이 정신만으로 존재할 수 없듯이 시 역시 정신만으로는 존재할 수 없다. 그런 점에서 시의 몸은 매우 중요하다. 시에 있어서도 새로운 정신이 새로운 몸을 입고 나타날 때 좋은 시가 된다. 다음의 시는 시의 몸으로서의 존재 찾기의 사유를 보여주고 있다.
쓰는 건 모두 시다 원고지 뒷장에 갈기는 낙서 거리에 떨어지는 햇살 아스팔트에 뒹구는 낙엽 달리는 자동차 달리는 오토바이 해안에 부서지는 포말 새기고 사라지고 쓰고 다시 쓴다 낙서도 편지도 일기도 만화도 신문도 마침내 신문도 신문도 시다 시는 쓰는 것 새기는 것 흘러가는 것 그러므로 가을 오후 시청 앞 사람들도 시다 모두가 시다 시는 없으므로 이 시들을 사랑해야 하리 간판도 거리에 시를 쓰고 마네킹도 유리창에 시를 쓰고 이 저녁도 시를 쓴다 시를 쓰며 한 세상 산다 시는 없으므로
―이승훈,「모두가 시다」전문(『현대시학』2004년 1월호)
인용 시는 시란 무엇인가 하는 본질적인 사유에서 출발하고 있다. 우리는 일반적으로 시를 산문과는 상반되는 문학장르로 읽으면서 고정관념 속의 시를 생각하지만, 이승훈 시인은 이러한 우리의 고정관념을 일순에 전복시켜버린다. 시인은 "쓰는 건 모두 시다"라고 주장한다. 그러므로 시인에게 있어서 '낙서', '햇살', '낙엽', '자동차', '오토바이', '포말'등은 모두 시이다. 시인은 처음엔 쓰는 것은 모두 시라고 말하다가 나중에는 새기는 것 흘러가는 것도 시라고 말한다. 이렇듯 시에 대한 존재론적 의미는 무한히 확장되고 해체되어 급기야는 모든 것이 시라는 사유에 도달하게 된다. 그리고 시인은 그러한 시를 사랑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런데 사랑해야 할 이유로 시인은 "시는 없으므로" 사랑해야 한다고 말한다. 시인의 이러한 사유는 곰곰이 생각해보면 쉽게 이해된다. 모든 것이 시라는 사유에 이르러 보면 결국 시는 아무것도 아니고 시는 없게 된다. 이러한 시인의 진술의 이면에는 세상의 고정관념에 대한 야유를 함의하고 있다. 물신주의가 팽배해 있는 이 땅에서 시가 존재할 곳은 없다. 그리고 시가 없는 세상에서 최고의 가치관은 '있다'는 소유 개념이다. 돈이 있고 명예가 있고 권력이 있어야 잘 살 수 있는 세상에서 시는 '없는 존재'이다. 시인은 이러한 물신주의에 반기를 들고 '없는'시를 사랑해야 한다고 말한다. 시는 없으므로 사랑해야만 할 가치를 지니는 것이다. 즉 시인은 시의 몸을 일상적인 눈으로 바라보지 않고 역설적인 눈으로 바라보고 있다. 시인의 눈에 시는 없음이라는 옷을 입고 존재한다. 그러므로 시는 역설적으로 말하면 이 땅의 모든 유한 한 물질 위에 존재하는 물질성의 한계를 뛰어넘는 존재인 셈이다.
이승훈이 위의 시에서 시가 없다고 말했다고 해서 시의 육체성이 없다는 의미로 받아들여서는 안된다. 시의 육체성은 '없음'이라는 옷을 입고도 존재한다. 그것은 시의 육체성이 단순히 물리적 차원의 물질로만 이루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사유라는 또 다른 물질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이다. 시는 사유 중에서도 특히 비유적 사유로 이루어져 있다. 우리가 흔히 비유가 잘 되어 있는 시를 좋은 시로 꼽게 되는 것도 비유라는 몸을 입은 시의 육체성이 투명하게 드러나 있기 때문이다. 시는 적절한 몸(표현)을 얻게 되어서야 비로소 진정한 정신(주제)과 하나가 된다.
잠결에
시가 막 밀려오는데도,
세계가 오로지 창(窓)이거나
지구라는 이 알이
알 속에서 부리로 마악 알을 깨고 있거나
시간이 영원히 온통
푸르른 여명의 파동이거나
하여간 그런 시가 밀려오는데도,
무슨 푸르른 공기의 우주
통과하지 못하는 물질이 없는 빛,
그 빛이 만드는 웃고있는 무한
온몸을 물들이는 무한,
하여간 그런 시가 밀려오는데도
나는 일어나 쓰지 않고
잠을 청하였으니......
(쓰지 않으면 없다는 생각도
이제는 없는지
잠의 품속에서도
알을 부화한다는 것인지)
―정현종, 「시가 막 밀려오는데」전문(『세계의 문학』2003년 겨울호)
필자의 경험으로도 잠결에 기가 막힌 시가 몰려올 때가 있다. 필자 역시 인용 시에서처럼 한번도 좋은 시를 얻은 적은 없지만, 이것은 누구나 흔히 할 수 있는 보편적인 체험이기 때문에 쉽게 공감이 간다. 그런데 시인이 잠결에 본 시의 형상은 그리 간단하게 설명되어지는 것이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시인은 자신이 잠결에 본 시를 "세계가 오로지 창(窓)이거나/지구라는 알이/알 속에서 부리로 마악 알을 깨고 있거나/시간이 영원히 온통/ 푸르른 여명의 파동이거나" "무슨 푸르른 공기의 우주/ 통과하지 못하는 물질이 없는 빛,/그 빛이 만드는 웃고있는 무한"이라는 복잡한 수식어로 설명하고 있다. 하지만 이러한 수식어를 간명하게 간추려보면, 시인이 잠결에 본 시는 푸르른 공기와 투명한 빛을 받고 있는 알(지구)속에서 깨어나는 환희에 찬 생명, 즉 "웃고 있는 무한"이나 '우주'의 형상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처럼 시의 육체는 종종 형이상학적 상상력의 옷을 입고 나타나기도 한다. 우리는 일반적으로 시를 써야 시가 존재한다는 생각을 하는데, 정현종 시인은 시는 쓰지 않는 곳에서도 존재하고 잠 속에서도 존재한다는 사유에까지 나아간다. 이러한 사유는 라캉이 "나는 생각하지 않는 곳에서 존재하고, 존재하지 않는 곳에서 생각한다"고 한 말과 유사한 맥락에서 읽힌다. 이처럼 시의 몸은 일상적 물질성을 뛰어 넘는 차원의 물질성을 지니고 있다.
화엄이란 구멍이 많다
구례 화엄사에 가서 보았다
절집 기둥 기둥 마다
처마 처마 마다
얼음 송송
구멍이 뚫려 있는 것을
그 속에서 누가 혈거시대를 보내고 있나
가만히 들여다보다가
개미와 벌과
또 그들의 이웃 무리가
내통하고 있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화엄은 피부호흡을 하는구나
들숨 날숨 온몸이 폐가 되어
환하게 뚫려있구나
그날 밤 누군가 똑똑 창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나는 잠을 털고 일어나 문을 열어 젖혔다
창문 앞 물오른 나무들이
손가락에 침을 묻혀
첫날밤을 염탐하듯
하늘에 뚫어놓은 구멍,
별들이 환한 박하향을 내고 있었다
―손택수, 「화엄에서」전문(『애지』2003년 겨울호)
이 시는 제목부터 낯설다. "화엄사에서"가 아니고 "화엄에서"라니? 화엄은 구체적인 대상이 아니고 하나의 관념이다. 시인은 '화엄'이라는 관념에 육체성을 부여하고 있다. "화엄이란 구멍이 많다"는 진술 역시 같은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다. '화엄'은 관념이지만 시인에게는 구체적인 육체로 읽히는 것이다. 물론 시인은 화엄의 육체성을 화엄사라는 대상을 통해서 환유적으로 읽어낸다. 시인은 절집 기둥과 처마에 송송 뚫려있는 구멍을 통해 개미와 벌이 서로 소통하고 있는 모습을 통해서 '화엄'의 실체를 인식한다. 사실 따지고 보면 '화엄'이라는 불교 사상 역시 자아와 타자의 '관계' 즉 열린 차원의 소통을 강조하고 있지 않은가? 시인의 이러한 사유는 급기야 절터에서 벗어나 우주로 향해있다. 시인은 하늘에서 박하향을 내며 반짝이고 있는 별들을 "창문 앞 물오른 나무들이/ 손가락에 침 묻혀/ 첫날밤을 염탐하듯/ 하늘에 뚫어놓은 구멍"으로 형상화시키고 있다. 시인은 자아라는 견고한 육체성을 허물고 그 곳에 '관계'의 구멍을 숭숭 뚫어놓은 곳에서 화엄의 육체성을 발견한다. 이처럼 물질이 아닌 것을 물질로 읽어낼 수 있는 것이 시인의 눈이다.
내 눈 속에 나비 한 마리 살고 있다
부신 햇살을 타고 어느 먼 풀밭이 문득 내 눈 속으로 들어온 것이다
풀꽃만한 나비 한 마리가 그 속을 종일 날고 있다
(중략)
어느날 내가 바르트의 텍스트를 펼쳤을 때 그는
문득 날아와 다시 어룽대기 시작했다
더듬이를 비비고 은빛 날개를 턴다
행간이 뿌옇다
흰 벽 같은 세상과 마주할 때, 흔들리는 길 위에 있을 때
그는 나와 그것들의 행간에서 어룽거렸다
나는 그를 검열하는 어룽나비라고 부르기로 했다
―홍승주, 「내 눈 속으로 들어온 나비」부분( 『리토피아』2003년 겨울호)
눈에서 나비같은 것이 어룽거리는 현상, 즉 환시 현상을 시인은 자신의 눈 속에 나비가 살고 있다고 바꾸어 말하고 있다. 의사는 이런 현상을 "망막에 이상이 생겨 맺힌 像"으로 설명하지만, 시인의 눈에는 그것이 '나비'로 인식되는 것이다. 그런데 왜 하필이면 사라졌던 나비가 "바르트의 텍스트를 펼쳤을 때"다시 나타난 것일까? 시인이 바르트를 읽는 의도는 아마도 어떤 규칙이나 문법에도 얽매이지 않는 롱랑 바르트의 자유로운 글쓰기로부터 어떤 자유를 배우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바르트가 모든 글을 하나의 기호로 인식했듯이 시인 역시 나비를 하나의 기호로 인식하고 있다. 이 시에서 '나비'라는 기호는, 그러나 자유와는 상반되는 '검열'로서의 기호이다. 나비는 시인이 "흰 벽과 같은 세상과 마주할 때"나 "흔들리는 길 위에 있을 때" 시인의 눈 속에 나타나서 경고의 신호를 보낸다. 시인이 환시 현상을 "검열하는 어룽나비"라고 명명하고 있는 이유는 아마도 자기 검열을 통해서 진정한 자유를 누리기 위해서일 것이다.
담배를 끊고부터 그녀에게
달콤한 구름도넛을 만들어줄 수 없게 된 남자, 생각 끝에
구름수풀 헤적여 반지를 건져다 주었지
강변에 앉아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는 여자와
잠시 흐름을 멈추고 물비늘의 반짝임 속으로 몸을 숨기는 강물
반지의 동그라미 속에 찰랑찰랑 함께 갇혔지
물 항아리 속 웅숭깊은 우렁각시 그 여자, 날마다
남자의 빈집으로 동그랗게 소반을 차리러 가지
그녀가 나간 사이
동그라미 속 동그마니 남은 마음들 살금살금 실금이 가기 시작하지
저녁의 붉은 강물이
그녀 긴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고
개망초 떨리는 꽃빛이 빠져나가고
잠 속에서도 젖지 않는 비오리 속날개가 빠져나가지
달콤한 도넛구름이 빠져나가지 남자가 빠져나가지
우렁이 껍질 같이 가벼워진 물 항아리만 물 위에 두고
그녀가 빠져나가지
―류인서, 「구름도넛」전문(『현대시』2004년 1월호)
류인서의 「구름도넛」은 처음엔 따뜻하게 읽히다가 차츰 서늘하게 읽힌다. 그것은 이 시가 허무 쪽으로 걸어가고 있는, 삶의 과정으로서의 여성성을 파노라마처럼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1연은 담배를 끊고부터 그녀에게 구름도넛을 만들어줄 수 없는 남자가 그 대신 구름수풀을 헤적여 반지를 건져다 준다는, 다소 황당한 이야기를 근간으로 하고 있다. 하지만 이 시의 문맥을 자세히 읽어보면 결코 황당하게 느껴지지 않는다. 그것은 이 시의 둘 째 연에 나오는 우렁각시 설화와 만나면서 시적 진정성을 얻게 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1연의 중심 이미지인 '구름도넛'과 '반지'는 무엇을 의미하고 있는 것일까? 사내가 그녀에게 만들어준 '달콤한 구름도넛'은 남편에 대한 그녀의 달콤한 환상의 환유이고, '반지'는 둥글다는 이미지 속에 일종의 성적인 메타포를 숨기고 있는 것처럼 읽힌다. 즉 1연은 신혼의 환상을 잃어버린 아내에게 남편이 그 대신 성적인 즐거움을 준다는 줄거리로 요약된다. 그렇기 때문에 강물도 "잠시 흐름을 멈추고 물비늘의 반짝임 속으로 몸을 숨기"고, 그들은 "반지의 동그라미 속에 찰랑찰랑 함께 갇"히는 행복을 누리는 것이다. 그런데 2연에 오면 여자는 우렁각시가 되어 남자의 빈집으로 소반을 차리러 가게 되는데, 여기서의 '남자'는 문맥상으로 보면 1연의 '남자'인 남편이 아니라 다른 남자 즉 외간남자로 읽힌다. 그렇기 때문에 "그녀가 나간 사이/동그라미 속 동그마니 남은 마음들 살금살금 실금이 가기 시작하"는 것이다. 한마디로 말하면 2연은 남편에게서 떠나가는 그녀의 마음상태를 보여주고 있다. 3연에 오면 그녀의 여성성은 거의 황폐화되고 그녀의 존재의 집이었던 '물항아리' 역시 그녀가 빠져나간 후 우렁이 껍질처럼 가벼워져서 물위에 둥둥 떠있게 된다. 우리는 3연에서, 그녀의 긴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간 "저녁의 붉은 강물"이 여성의 폐경을 암시해주고 있다는 것과, "개망초 떨리는 꽃빛"이라든가 "잠 속에서도 젖지 않는 비오리 속날개"에서 젊은 여성이 가지고 있던 사랑의 감정이나 꿈, 또는 희망의 은유를 읽어낼 수 있다. 이처럼 이 시는 소멸되어 가는 여성성과 아프게 대면하면서 여성의 존재성을 반추해 보고 있다. 이러한 시인의 노력은 어떤 결론을 향하고 있지는 않지만, 그 과정 속에 배치되어 있는 내밀한 시의 육체성을 읽어내는 재미만으로도 이 시의 존재이유는 충분하다는 생각이 든다.
이 밖에 필자가 관심있게 읽은 시들은 이나명의 「왜가리는 왜 몸이 가벼운가」(『현대시』 2003년 12월호)와 김경인의 「거울을 만드는 사람」(『세계의 문학』 2003년 겨울호), 김행숙의 「한 사람」(『애지』 2003년 겨울호), 안명옥의 「먹구름」(『불교문예』2003년 겨울호) 등이다. 이들 시 역시 좋은 시의 눈과 몸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지면관계상 구체적으로 거론하지 못하는 것을 아쉽게 생각한다.
<제3의 문학>2004년 봄호
풀잎에 맺혀있는 작은 물방울을 바라보면 그 속에 눈빛이 있고 그 눈빛은 투명한 눈이면서 동시에 몸이라는 것을 느끼게 된다. 우리 눈에 그것은 하찮은 작은 물방울에 지나지 않지만, 자세히 보면 그 자체가 우주이고 살아서 꿈틀거리는 유기체인 것이다. 시 역시 물방울처럼 이목구비를 지니고 있는 우주이다. 물방울이 동그랗고 투명한 눈으로 세계를 바라보듯 시 역시 시만의 눈으로 세계를 바라보고 대화하고 소통한다. 시는 시의 눈으로 세계를 보고 세계는 세계의 눈으로 시를 본다. 이처럼 세계와 시는 끊임없이 소통하면서 우리 앞에 존재한다. 시가 시의 눈으로 세계를 바라볼 때 시의 눈이 강조되지만, 세계가 세계의 눈으로 시를 바라볼 때 시의 몸이 강조된다. 여기서의 세계는 다른 말로 말하면 시의 밖에 존재하는 또 다른 '타자'이다. 우리가 시를 읽을 때 종종 우리는 시의 밖에 존재하는 타자가 되어 시를 읽는다. 이 때 세계와 소통의 통로를 가지고 있는 시들은 우리에게 투명하게 읽히고 그렇지 않은 시들은 불투명하고 난해하게 읽힌다.
한편, 우리는 종종 시의 눈을 가지고 시를 읽고 세상을 읽기도 한다. 여기서의 '시의 눈'은 흔히 우리가 말하는 시안(詩眼)으로 풀이할 수도 있지만, 중국 고전 시학에서 유래한 '시안(詩眼)'의 본래적 의미는 시 스스로가 지니고 있는 존재의 눈이라기보다는, 우리가 시를 쓸 때 언어의 표현에서 가장 핵심적인 부분, 다시 말하면 시의 생명력이 응집된, 시 전체를 빛나게 하는 시어나 시구를 의미한다. 말하자면 화룡점정의 '용의 눈'과 같은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런데 현대시에서 쓰이는 '시안'은 이러한 좁은 뜻에서 벗어나서 '좋은 시를 읽어내는 눈' 혹은 '관습적 세상과 구별되는 시인의 눈 또는 시의 눈'으로 종종 읽히고 있다. 필자가 이 글에서 사용하려는 '시의 눈'은 후자에 가깝다. 그러므로 여기서의 '시의 눈'은 일상적 세상의 눈과 구별되는 '시인만의 독특한 눈'을 의미하면서 동시에 '시 자체가 지니고 있는 눈'으로서의 이중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시의 눈'은 잠자리의 눈과 같은 '겹눈'이다. 다음의 시는 이러한 '시의 눈'에 대한 사유를 간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시에는 눈이 있다
언제나 이쪽은 보지 않고 저쪽
보이지 않는 그쪽만 본다.
가고있는 사람의 발자국은 보지 않고
돌에 박힌
가지 않는 사람의 발자국만 본다.
바람에 슬리며 바람을 달래며
한 송이 꽃이 피어난다.
루오할아버지가 그린 예수의 얼굴처럼
윤곽만 있고 耳目口鼻가 없다.
그걸 바라보는 조금 갈색진 눈,
슬프디 슬픈 시의 눈,
―김춘수,「詩眼」전문(『시안』2003년 겨울호)
인용 시에서 시적 화자는 시에도 눈이 있다고 말한다. 그런데 시의 내용을 읽어보면 '시의 눈'은 일상적인 사람의 눈과는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시의 눈은 언제나 '저쪽'만 보는 눈이고, "가지 않는 사람의 발자국"만 보고, 이목구비는 없고 윤곽만 있는 루오 할아버지가 그린 예수의 얼굴을 보듯, 사물의 '윤곽'만 보는 특이한 눈이다. 좀더 이 시를 풀이하자면, 시의 눈은 사물의 '이쪽'보다는 '저쪽' 즉 사물의 이면을 보고, 그 이면에 찍혀있는 "가지 않는 사람의 발자국"을 본다. 그리고 시인이 이 시에서 말하고 있는 이목구비가 없는 윤곽만 있는 얼굴이란 일상적인 얼굴을 넘어선, 시적으로 변용된 얼굴을 의미한다. 그런데 이런 시의 눈앞에서 한송이 꽃이 피어난다. 그 꽃은 "바람에 슬리며 바람을 달래며" 피는 꽃이다. 여기서 바람에 슬린다는 것은 피동적 주체로서의 의미를 나타내며 바람을 달랜다는 것은 반대로 능동적인 주체로서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 다시 말하면 시는 시의 눈을 가지고 세상을 바라보기 이전에 꽃으로 피어나는 자신의 존재를 보고 있는 것이다. 일찍이 시 자체로서의 존재시학을 펼쳐 보여준 바 있는 김춘수 시인다운 발상이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하나밖에 없는 뿔
자랑 마라
뿔없는 나도 하나밖에 없다
언제부턴가 나는
마음속 허공 내려놓고
모든 그림자 들이박는
힘센 뿔 하나 갖고 싶었다
뿔이 있다면
무엇이든 들이박고 싶은 때가
나에게도 있었다 아마 너에게도
그때 너가
나에게로 왔다
아무데나 가지 않고
아무데서나 숙이지 않는
무소의 뿔처럼 홀로
―천양희, 「詩」(『한국문학』2003년 겨울호)
이 시는 김춘수의 「詩眼」과는 또 다른 관점에서 시와 시인 자신을 바라보고 있다. 여기서의 시와 시인은 어떤 '관계'속에 놓여있다. 그것은 단적으로 말하면 존재론적 관계이다. 시인은 시에게 말한다. "하나밖에 없는 뿔/ 자랑 마라"고. 시인은 자신이 뿔이 없다는 것 때문에 몹시 뿔을 가지고 싶어하지만, 동시에 "뿔없는 나" 즉 자신의 고유한 존재성을 망각하지 않고 있다. 그런데 뿔을 열망하던 시인에게 뿔인 시가 오게 됨으로서 시인은 비로소 시인이 된다. 여기서의 시는 하나밖에 없는 뿔을 가지고 있는 존재이지만, 그 자신이 뿔이 되어 시인에게 왔다는 점에서 몸 전체가 뿔인 독특한 존재인 것이다. 비로소 시인은 "아무데나 가지 않고/아무데서나 숙이지 않는/ 무소의 뿔"같은 시의 뿔을 지니게 된 것이다. 하지만 여기서의 뿔은 우리가 일상적으로 느끼는 무기로서의 뿔이 아니다. 즉 시의 뿔은 "마음의 허공 내려놓고/모든 그림자 들이받는" 뿔이다. 이 시의 '그림자'가 김춘수의 시에서 '윤곽'과 같은 맥락에서 읽히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다. 즉 천양희의 '시의 뿔'은 다른 말로 말하면 '시의 눈'인 셈이다. 그러므로 시인은 시의 뿔, 즉 시의 눈을 가질 때에야 비로소 진정한 시인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이처럼 '시의 눈'은 시인에게 있어서 필수불가결한 요소이다. 하지만 시에는 눈만 있는 것이 아니라 육체성으로서의 '시의 몸'이 있다. 시인은 시의 눈으로 세상과 자신을 바라볼 뿐만 아니라, 시의 몸, 즉 육체성을 지닌 시로서의 대상도 찾아낼 수 있어야 한다. 최근의 정진규 시인의 「몸詩」연작에서 보듯, 현대시에서 육체성으로서의 '몸'은 점점 더 강조되고 있는 추세이다. 인간이 정신만으로 존재할 수 없듯이 시 역시 정신만으로는 존재할 수 없다. 그런 점에서 시의 몸은 매우 중요하다. 시에 있어서도 새로운 정신이 새로운 몸을 입고 나타날 때 좋은 시가 된다. 다음의 시는 시의 몸으로서의 존재 찾기의 사유를 보여주고 있다.
쓰는 건 모두 시다 원고지 뒷장에 갈기는 낙서 거리에 떨어지는 햇살 아스팔트에 뒹구는 낙엽 달리는 자동차 달리는 오토바이 해안에 부서지는 포말 새기고 사라지고 쓰고 다시 쓴다 낙서도 편지도 일기도 만화도 신문도 마침내 신문도 신문도 시다 시는 쓰는 것 새기는 것 흘러가는 것 그러므로 가을 오후 시청 앞 사람들도 시다 모두가 시다 시는 없으므로 이 시들을 사랑해야 하리 간판도 거리에 시를 쓰고 마네킹도 유리창에 시를 쓰고 이 저녁도 시를 쓴다 시를 쓰며 한 세상 산다 시는 없으므로
―이승훈,「모두가 시다」전문(『현대시학』2004년 1월호)
인용 시는 시란 무엇인가 하는 본질적인 사유에서 출발하고 있다. 우리는 일반적으로 시를 산문과는 상반되는 문학장르로 읽으면서 고정관념 속의 시를 생각하지만, 이승훈 시인은 이러한 우리의 고정관념을 일순에 전복시켜버린다. 시인은 "쓰는 건 모두 시다"라고 주장한다. 그러므로 시인에게 있어서 '낙서', '햇살', '낙엽', '자동차', '오토바이', '포말'등은 모두 시이다. 시인은 처음엔 쓰는 것은 모두 시라고 말하다가 나중에는 새기는 것 흘러가는 것도 시라고 말한다. 이렇듯 시에 대한 존재론적 의미는 무한히 확장되고 해체되어 급기야는 모든 것이 시라는 사유에 도달하게 된다. 그리고 시인은 그러한 시를 사랑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런데 사랑해야 할 이유로 시인은 "시는 없으므로" 사랑해야 한다고 말한다. 시인의 이러한 사유는 곰곰이 생각해보면 쉽게 이해된다. 모든 것이 시라는 사유에 이르러 보면 결국 시는 아무것도 아니고 시는 없게 된다. 이러한 시인의 진술의 이면에는 세상의 고정관념에 대한 야유를 함의하고 있다. 물신주의가 팽배해 있는 이 땅에서 시가 존재할 곳은 없다. 그리고 시가 없는 세상에서 최고의 가치관은 '있다'는 소유 개념이다. 돈이 있고 명예가 있고 권력이 있어야 잘 살 수 있는 세상에서 시는 '없는 존재'이다. 시인은 이러한 물신주의에 반기를 들고 '없는'시를 사랑해야 한다고 말한다. 시는 없으므로 사랑해야만 할 가치를 지니는 것이다. 즉 시인은 시의 몸을 일상적인 눈으로 바라보지 않고 역설적인 눈으로 바라보고 있다. 시인의 눈에 시는 없음이라는 옷을 입고 존재한다. 그러므로 시는 역설적으로 말하면 이 땅의 모든 유한 한 물질 위에 존재하는 물질성의 한계를 뛰어넘는 존재인 셈이다.
이승훈이 위의 시에서 시가 없다고 말했다고 해서 시의 육체성이 없다는 의미로 받아들여서는 안된다. 시의 육체성은 '없음'이라는 옷을 입고도 존재한다. 그것은 시의 육체성이 단순히 물리적 차원의 물질로만 이루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사유라는 또 다른 물질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이다. 시는 사유 중에서도 특히 비유적 사유로 이루어져 있다. 우리가 흔히 비유가 잘 되어 있는 시를 좋은 시로 꼽게 되는 것도 비유라는 몸을 입은 시의 육체성이 투명하게 드러나 있기 때문이다. 시는 적절한 몸(표현)을 얻게 되어서야 비로소 진정한 정신(주제)과 하나가 된다.
잠결에
시가 막 밀려오는데도,
세계가 오로지 창(窓)이거나
지구라는 이 알이
알 속에서 부리로 마악 알을 깨고 있거나
시간이 영원히 온통
푸르른 여명의 파동이거나
하여간 그런 시가 밀려오는데도,
무슨 푸르른 공기의 우주
통과하지 못하는 물질이 없는 빛,
그 빛이 만드는 웃고있는 무한
온몸을 물들이는 무한,
하여간 그런 시가 밀려오는데도
나는 일어나 쓰지 않고
잠을 청하였으니......
(쓰지 않으면 없다는 생각도
이제는 없는지
잠의 품속에서도
알을 부화한다는 것인지)
―정현종, 「시가 막 밀려오는데」전문(『세계의 문학』2003년 겨울호)
필자의 경험으로도 잠결에 기가 막힌 시가 몰려올 때가 있다. 필자 역시 인용 시에서처럼 한번도 좋은 시를 얻은 적은 없지만, 이것은 누구나 흔히 할 수 있는 보편적인 체험이기 때문에 쉽게 공감이 간다. 그런데 시인이 잠결에 본 시의 형상은 그리 간단하게 설명되어지는 것이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시인은 자신이 잠결에 본 시를 "세계가 오로지 창(窓)이거나/지구라는 알이/알 속에서 부리로 마악 알을 깨고 있거나/시간이 영원히 온통/ 푸르른 여명의 파동이거나" "무슨 푸르른 공기의 우주/ 통과하지 못하는 물질이 없는 빛,/그 빛이 만드는 웃고있는 무한"이라는 복잡한 수식어로 설명하고 있다. 하지만 이러한 수식어를 간명하게 간추려보면, 시인이 잠결에 본 시는 푸르른 공기와 투명한 빛을 받고 있는 알(지구)속에서 깨어나는 환희에 찬 생명, 즉 "웃고 있는 무한"이나 '우주'의 형상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처럼 시의 육체는 종종 형이상학적 상상력의 옷을 입고 나타나기도 한다. 우리는 일반적으로 시를 써야 시가 존재한다는 생각을 하는데, 정현종 시인은 시는 쓰지 않는 곳에서도 존재하고 잠 속에서도 존재한다는 사유에까지 나아간다. 이러한 사유는 라캉이 "나는 생각하지 않는 곳에서 존재하고, 존재하지 않는 곳에서 생각한다"고 한 말과 유사한 맥락에서 읽힌다. 이처럼 시의 몸은 일상적 물질성을 뛰어 넘는 차원의 물질성을 지니고 있다.
화엄이란 구멍이 많다
구례 화엄사에 가서 보았다
절집 기둥 기둥 마다
처마 처마 마다
얼음 송송
구멍이 뚫려 있는 것을
그 속에서 누가 혈거시대를 보내고 있나
가만히 들여다보다가
개미와 벌과
또 그들의 이웃 무리가
내통하고 있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화엄은 피부호흡을 하는구나
들숨 날숨 온몸이 폐가 되어
환하게 뚫려있구나
그날 밤 누군가 똑똑 창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나는 잠을 털고 일어나 문을 열어 젖혔다
창문 앞 물오른 나무들이
손가락에 침을 묻혀
첫날밤을 염탐하듯
하늘에 뚫어놓은 구멍,
별들이 환한 박하향을 내고 있었다
―손택수, 「화엄에서」전문(『애지』2003년 겨울호)
이 시는 제목부터 낯설다. "화엄사에서"가 아니고 "화엄에서"라니? 화엄은 구체적인 대상이 아니고 하나의 관념이다. 시인은 '화엄'이라는 관념에 육체성을 부여하고 있다. "화엄이란 구멍이 많다"는 진술 역시 같은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다. '화엄'은 관념이지만 시인에게는 구체적인 육체로 읽히는 것이다. 물론 시인은 화엄의 육체성을 화엄사라는 대상을 통해서 환유적으로 읽어낸다. 시인은 절집 기둥과 처마에 송송 뚫려있는 구멍을 통해 개미와 벌이 서로 소통하고 있는 모습을 통해서 '화엄'의 실체를 인식한다. 사실 따지고 보면 '화엄'이라는 불교 사상 역시 자아와 타자의 '관계' 즉 열린 차원의 소통을 강조하고 있지 않은가? 시인의 이러한 사유는 급기야 절터에서 벗어나 우주로 향해있다. 시인은 하늘에서 박하향을 내며 반짝이고 있는 별들을 "창문 앞 물오른 나무들이/ 손가락에 침 묻혀/ 첫날밤을 염탐하듯/ 하늘에 뚫어놓은 구멍"으로 형상화시키고 있다. 시인은 자아라는 견고한 육체성을 허물고 그 곳에 '관계'의 구멍을 숭숭 뚫어놓은 곳에서 화엄의 육체성을 발견한다. 이처럼 물질이 아닌 것을 물질로 읽어낼 수 있는 것이 시인의 눈이다.
내 눈 속에 나비 한 마리 살고 있다
부신 햇살을 타고 어느 먼 풀밭이 문득 내 눈 속으로 들어온 것이다
풀꽃만한 나비 한 마리가 그 속을 종일 날고 있다
(중략)
어느날 내가 바르트의 텍스트를 펼쳤을 때 그는
문득 날아와 다시 어룽대기 시작했다
더듬이를 비비고 은빛 날개를 턴다
행간이 뿌옇다
흰 벽 같은 세상과 마주할 때, 흔들리는 길 위에 있을 때
그는 나와 그것들의 행간에서 어룽거렸다
나는 그를 검열하는 어룽나비라고 부르기로 했다
―홍승주, 「내 눈 속으로 들어온 나비」부분( 『리토피아』2003년 겨울호)
눈에서 나비같은 것이 어룽거리는 현상, 즉 환시 현상을 시인은 자신의 눈 속에 나비가 살고 있다고 바꾸어 말하고 있다. 의사는 이런 현상을 "망막에 이상이 생겨 맺힌 像"으로 설명하지만, 시인의 눈에는 그것이 '나비'로 인식되는 것이다. 그런데 왜 하필이면 사라졌던 나비가 "바르트의 텍스트를 펼쳤을 때"다시 나타난 것일까? 시인이 바르트를 읽는 의도는 아마도 어떤 규칙이나 문법에도 얽매이지 않는 롱랑 바르트의 자유로운 글쓰기로부터 어떤 자유를 배우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바르트가 모든 글을 하나의 기호로 인식했듯이 시인 역시 나비를 하나의 기호로 인식하고 있다. 이 시에서 '나비'라는 기호는, 그러나 자유와는 상반되는 '검열'로서의 기호이다. 나비는 시인이 "흰 벽과 같은 세상과 마주할 때"나 "흔들리는 길 위에 있을 때" 시인의 눈 속에 나타나서 경고의 신호를 보낸다. 시인이 환시 현상을 "검열하는 어룽나비"라고 명명하고 있는 이유는 아마도 자기 검열을 통해서 진정한 자유를 누리기 위해서일 것이다.
담배를 끊고부터 그녀에게
달콤한 구름도넛을 만들어줄 수 없게 된 남자, 생각 끝에
구름수풀 헤적여 반지를 건져다 주었지
강변에 앉아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는 여자와
잠시 흐름을 멈추고 물비늘의 반짝임 속으로 몸을 숨기는 강물
반지의 동그라미 속에 찰랑찰랑 함께 갇혔지
물 항아리 속 웅숭깊은 우렁각시 그 여자, 날마다
남자의 빈집으로 동그랗게 소반을 차리러 가지
그녀가 나간 사이
동그라미 속 동그마니 남은 마음들 살금살금 실금이 가기 시작하지
저녁의 붉은 강물이
그녀 긴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고
개망초 떨리는 꽃빛이 빠져나가고
잠 속에서도 젖지 않는 비오리 속날개가 빠져나가지
달콤한 도넛구름이 빠져나가지 남자가 빠져나가지
우렁이 껍질 같이 가벼워진 물 항아리만 물 위에 두고
그녀가 빠져나가지
―류인서, 「구름도넛」전문(『현대시』2004년 1월호)
류인서의 「구름도넛」은 처음엔 따뜻하게 읽히다가 차츰 서늘하게 읽힌다. 그것은 이 시가 허무 쪽으로 걸어가고 있는, 삶의 과정으로서의 여성성을 파노라마처럼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1연은 담배를 끊고부터 그녀에게 구름도넛을 만들어줄 수 없는 남자가 그 대신 구름수풀을 헤적여 반지를 건져다 준다는, 다소 황당한 이야기를 근간으로 하고 있다. 하지만 이 시의 문맥을 자세히 읽어보면 결코 황당하게 느껴지지 않는다. 그것은 이 시의 둘 째 연에 나오는 우렁각시 설화와 만나면서 시적 진정성을 얻게 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1연의 중심 이미지인 '구름도넛'과 '반지'는 무엇을 의미하고 있는 것일까? 사내가 그녀에게 만들어준 '달콤한 구름도넛'은 남편에 대한 그녀의 달콤한 환상의 환유이고, '반지'는 둥글다는 이미지 속에 일종의 성적인 메타포를 숨기고 있는 것처럼 읽힌다. 즉 1연은 신혼의 환상을 잃어버린 아내에게 남편이 그 대신 성적인 즐거움을 준다는 줄거리로 요약된다. 그렇기 때문에 강물도 "잠시 흐름을 멈추고 물비늘의 반짝임 속으로 몸을 숨기"고, 그들은 "반지의 동그라미 속에 찰랑찰랑 함께 갇"히는 행복을 누리는 것이다. 그런데 2연에 오면 여자는 우렁각시가 되어 남자의 빈집으로 소반을 차리러 가게 되는데, 여기서의 '남자'는 문맥상으로 보면 1연의 '남자'인 남편이 아니라 다른 남자 즉 외간남자로 읽힌다. 그렇기 때문에 "그녀가 나간 사이/동그라미 속 동그마니 남은 마음들 살금살금 실금이 가기 시작하"는 것이다. 한마디로 말하면 2연은 남편에게서 떠나가는 그녀의 마음상태를 보여주고 있다. 3연에 오면 그녀의 여성성은 거의 황폐화되고 그녀의 존재의 집이었던 '물항아리' 역시 그녀가 빠져나간 후 우렁이 껍질처럼 가벼워져서 물위에 둥둥 떠있게 된다. 우리는 3연에서, 그녀의 긴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간 "저녁의 붉은 강물"이 여성의 폐경을 암시해주고 있다는 것과, "개망초 떨리는 꽃빛"이라든가 "잠 속에서도 젖지 않는 비오리 속날개"에서 젊은 여성이 가지고 있던 사랑의 감정이나 꿈, 또는 희망의 은유를 읽어낼 수 있다. 이처럼 이 시는 소멸되어 가는 여성성과 아프게 대면하면서 여성의 존재성을 반추해 보고 있다. 이러한 시인의 노력은 어떤 결론을 향하고 있지는 않지만, 그 과정 속에 배치되어 있는 내밀한 시의 육체성을 읽어내는 재미만으로도 이 시의 존재이유는 충분하다는 생각이 든다.
이 밖에 필자가 관심있게 읽은 시들은 이나명의 「왜가리는 왜 몸이 가벼운가」(『현대시』 2003년 12월호)와 김경인의 「거울을 만드는 사람」(『세계의 문학』 2003년 겨울호), 김행숙의 「한 사람」(『애지』 2003년 겨울호), 안명옥의 「먹구름」(『불교문예』2003년 겨울호) 등이다. 이들 시 역시 좋은 시의 눈과 몸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지면관계상 구체적으로 거론하지 못하는 것을 아쉽게 생각한다.
<제3의 문학>2004년 봄호
출처 : 두꺼운 연습공책
글쓴이 : 퍼플캣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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