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날은 간다
/기형도
햇빛은 분가루처럼 흩날리고
쉽사리 키가 변하는 그림자들은
한 장 열풍(熱風)에 말려 둥글게 휘어지는구나
아무 때나 손을 흔드는
미루나무 얕은 그늘 속을 첨벙이며
2시반 시외버스도 떠난 지 오래인데
아까부터 서울집 툇마루에 앉은 여자
외상값처럼 밀려드는 대낮
신작로 위에는 흙먼지, 더러운 비닐들
빈 들판에 꽂혀 있는 저 희미한 연기들은
어느 쓸쓸한 풀잎의 자손들일까
밤마다 숱한 나무젓가락들은 두 쪽으로 갈라지고
사내들은 화투패 마냥 모여들어 또 그렇게
어디론가 뿔뿔이 흩어져간다
여자가 속옷을 헹구는 시냇가엔
하룻밤새 없어져버린 풀꽃들
다시 흘러들어온 것들의 인사(人事)
흐린 알전구 아래 엉망으로 취한 군인은
몇 해 전 누이 얼굴을 알아보지 못하고,
여자는 자신의 생을 계산하지 못한다.
몇 번인가 아이를 지울 때 그랬듯이
습관적으로 주르르 눈물을 흘릴 뿐
끌어안은 무릎 사이에서
추억은 내용물 없이 떠오르고
소읍(小邑)은 무서우리만치 고요하다, 누구일까
세숫대야 속에 삶은 달걀처럼 잠긴 얼굴은
봄날이 가면 그뿐
숙취(宿醉)는 몇 장 지전(紙錢)속에서 구겨지는데
몇 개의 언덕을 넘어야 저 흙먼지들은
굳은 땅 속으로 하나둘 섞여들는지
................
오월도 마지막 주에 접어들었다.
따사롭게 내리쬐는 햇살,
푸른 나뭇잎의 틈새를 스치고나오며
말끔하게 세수하고 나온 상쾌한 바람,
겨드랑이를 간질이듯 스쳐 지나는
바람에 깔깔거리듯 흔들거리며 춤추는 나뭇가지들,
하늘은 맑고
코로나19 때문에 바깥출입을 삼가던 구름들도
모처럼 무리지어 두둥실 떠다닌다.
햇살이 조금 더 따갑고,
놀러왔던 꽃들이 다시 되돌아갔을 뿐,
봄, 여름 가릴 것 여전히 아름다운 계절이다.
하지만 계절의 미추를 떠나
여왕님은 이제 떠날 채비를 갖추신다.
그래,
이미 떠나버린 봄,
이제 길을 나서려는 여왕님,
세월 따라 계절은 잘도 흘러간다.
주말에 한번쯤은 홀로 또는 벗들과 더불어 산을 찾았고
함께 어울린 날은 여지없이 고주망태가 되었다.
홀로만의 산행이었다면 그저 자연에 취했으련만
산도 좋고 벗도 좋으니 어찌 흥에 겹지 않을 수 있었겠으며,
흥겨운 곳에 주님이 함께하지 않을 수 있었겠는가?
따지고 보면 모두가 아름다운 계절 때문이다.
허나 흥겨운 것도 그때 뿐
왠지 모르게 밀려오는 쓸쓸함과 허전함은 무슨 연유인지 모르겠다.
그냥 모를 때는 속 편하게 세월 탓,
계절 탓이라 생각하고 지나가는 게 상수다.
하지만 날이 갈수록 짙어가는 산야의 녹음은
또 우리의 마음을 앗아가겠지.
올여름엔 역대 급 무더위가 기승을 부릴 거란다.
봄이 가도 그 뿐이고
무더위도 때가 되어 오면 그뿐,
아직은 풋풋한 초여름의 정취에 취해서 살았으면 좋겠다.
그저 오늘도 내일도 기쁨이 넘치는 날들이었으면 얼마나 좋을까.
오월의 마지막 주 알차고 행복하게 보내시길 빕니다.
김아중의 “아베마리아”
마야의 “진달래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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