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으로부터50년 전인 1960년 1월 4일, 파리 근교에서 한 대의 자동차가 나무를 들이받는다. 차 안에 탑승했던 두 명의 남성은 즉사. 전후 프랑스 문단의 총아이자 도발적인 에세이스트로 한 시대를 풍미했던 “지상의 작가” 알베르 카뮈가 노벨상을 받은지 3년도 안돼 죽음에 이른, 아니 “신화”로 부활한 역사적 순간이다.
모든 건 지난해 11월 19일, 브뤼셀에서 열린 유럽 평의회에서 보도된 프랑스 대통령 사르코지의 제안에서 시작됐다. 카뮈를 팡테옹에 이장하자는 아이디어를 꺼내면서 사르코지는 "엘리트들에 대한 그[카뮈]의 비순응주의"를 치켜세우고 "알제리를 방문할 때마다 북아프리카에서 태어나지 못한 데 대한 노스텔지어"를 느낀다고 말하며 자신의 제안이 성사되면 참으로 “대단한 상징”이 될 것이라고 열변을 토했다.
일단 새롭게 사귄 친구 때문이라는 설이 있다. 주인공이 아랍인을 별 다른 이유없이 쏴죽이는 카뮈의 <이방인>이 "아주 재미있고 속도감있다"고 기자들에게 떠벌이다, 얼마 못가 "끝까지 읽을 계획은 없다"고 꼬리를 내렸던, 이라크전 책임자였던 조지 부시 전 대통령이 영감을 제공했다는 것.
믿거나 말거나, 어찌됐건 닭 모가지를 비틀어도 어차피 2010년은 카뮈의 50주기가 될 상황이었고, 현저하게 떨어진 지지율 속에서 일종의 돌파구를 찾으려는 이 정치적 몸부림 덕분에 카뮈에 대한 관심은 다시 전국민적인 것이 되었다. (물론 프랑스에서 카뮈는 이미 전국민적인 작가이다. 전세계 56개국 언어로 번역되었고, 해마다 프랑스에서만 여전히 18만부가 판매되는 그의 대표작 <이방인L’Etranger>은 1972년 갈리마르의 문고판(Folio)으로 출간된 이래 무려 6백6십만부가 팔려나간 프랑스 문고판 최고의 베스트 셀러이며 <페스트Le Peste>와 <전락La Chute> 역시 각각 3백 6십만, 백5십만부가 팔려나간 상태이다)
물론 충분히 예상할 수 있는 것이지만, 사르코지의 제안은 각계의 반대에 부딪혔다. 사르트르와의 유명한 논쟁이 웅변하듯 좌와 우를 가로지르는 모든 이데올로기에 저항, 아니 “반항”했던 카뮈의 근본적 반골기질을 조금이라도 알고 있는 사람이라면 그런 제안을 할리가 없지 않은가?” 물론 이런 반문은 정당한 것이지만, 그만큼 순진한 것이기도 하다. 그런 정도의 반문에 쉽게 철회할 요량이었다면 “그런 제안을 할리가 없지 않은가?”? 사태의 본질은 따라서 다른 데에서 찾아야 한다.
2.
단도직입적으로 말해 사르코지를 적당히 냉소하면서 카뮈를 적극적으로 옹호하는 일군의 프랑스-와 몇몇 영미권- 지식인들과 그들의 다양한 글을 읽을 때 우리가 확인하게 되는 건, 오히려 카뮈에 대한 사르코지의 선택이 참으로 적절한 것이라는, 아니 좀 과장해서- 한물간 표현을 빌어- 얘기하자면, 시대정신(Zeitgeist)의 핵심을 포착했다는 판단이다.
공산주의자도 사회주의자도 아니었지만 카뮈는 천성적으로 좌익이었다는 상식적인 주장은 차치하고서라도, 그가 니체주의자이자 동시에 어떤 정치적 대의에도 회수되지 않는 절대적 자유주의=무정부주의자라는 주장(미셸 옹프레이)이나, 카뮈의 무정부주의적-생디칼리즘은 기독교적 차원의 프롤레타리아 개념을 핵심으로 갖는다는 독특한 주장(쟝 다니엘)에 이르기까지 논거는 천차만별이지만, 그들 대부분은 카뮈가- 콜럼비아대 교수로 있는 슐레이만 바쉬르 디아뉴의 말을 빌면- “이 시대의 철학자”-“중 하나”가 아니라 말 그대로 “이 시대의 철학자”-라는 판단에 동의한다. 다시 말해, 의도와 논거, 접근방향만 다를 뿐, 사르코지와 그의 비판자들은 카뮈가 갖는 상징적 무게, 무엇보다 그의 시의성에 전적으로 동의하고 있는 것이다.
아무리 그렇다 해도, 카뮈가 “이 시대의 철학자”라고? “언젠가는 들뢰즈의 세기가 될 것”이라는 푸꼬의 예언 아닌 예언이야 그렇다 치더라도, 바디우도, 랑시에르도, 아감벤도, 지젝도 아닌, (겨우?!) 카뮈가?
그렇게 생각하기 쉽지만, 그보다는 그가 제기했던 질문들이 우리 시대와 다시금 공명한 결과라고 보는 게 더 정확할 것이다. 우리는 알-카에다와 오사마 빈 라덴의 위협 속에서 “테러리즘에 대한 성찰”과 <반항하는 인간>을 다시 읽고, 잘되거나 안되거나 모든 책임이 전적으로 자기만의 것이 된 신자유주의의 폭풍과 그와 더불어 솟아오르는 자살률 속에서 “진정으로 심각한 철학적 문제는 자살”이라는 그의 명제를 진지하게 곱씹을 수 있게 된 것이다.
하지만 이보다 근본적으로, 카뮈를- 아이러니칼한 의미에서- 진정 “이 시대의 철학자”로 만드는 열쇠는 내가 보기에 "절제된/절도 있는 반항(une révolte mesurée)"이라는 개념에 있다. <누벨 옵세르바퇴르>지의 창간인이자 현 편집장인 장 다니엘은 체코나 폴란드와 같은 동구권 지식인들이 지금 카뮈에 관심을 기울이는 이유를 그들이 공산주의 “혁명의 공포”를 경험했다는 데에서 찾는데, 이는 그의 의도와 무관하게 매우 징후적인 관찰이 아닐 수 없다. 반항하되 선을 넘지 말라는 것, 다시 말해 혁명은 안된다는 것. 한 쪽으로 쏠린 혁명은-그것이 좌이건 우이건- 반항이 아니라는 것이 카뮈가 정의한 “반항” 개념의 핵심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말하면 너무 싱거워보일지 모르니, 다른 예를 들어보자.
참으로 그럴듯하지 않은가? 이러한 논리를 가장 압축적으로 보여준 것은 지난 해 말 <교수신문>에 실린 소조님의 글인데, 거기서 용산참사를 계기로 문인들이 표명했던- 매체 전반에 걸쳐 소리 없이 뮤트된- 저항과 이명박(정부)에 대한 비판은 “페티시즘” 즉 “물신주의”에 불과한 것으로 단칼에 일축되었다. 이를 우리에게 좀 더 익숙한 말로 풀어쓰자면, “우리 안의 파시즘”을 보지 않고, “우리 안의 이명박”을 정화하지 않고서 선과 악을 분명하게 나누려는 기도야 말로 진정한, 혹은 우둔한 정치적 음모라는 것이다. ([사르코지 정부를 일컬어] “잔인한 과두제(une oligarchie feroce)”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만, [그렇다면] 누진소득세를 집행하는 사람들은 누구고, 가장 부유한 사람들에게 자기가 버는 소득의 절반을 내도록 만드는 사람들은 누구란 말입니까?”)
http://www.youtube.com/watch?v=NhbK2bMTRb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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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이 바로 카뮈를 “새로운 철학자 Camus, le nouveau philosophe”[1970년대 중후반 맑시즘을 전체주의와 동일시하면서 프랑스에서 단숨에 “떴던” 일군의 미디어 지식인들, 즉 베르나르-앙리 레비와 앙드레 글뤽스만 일파에게 붙여졌던 이 칭호가 카뮈에게 다시 붙여졌다는 것 역시 매우 징후적인 대목이 아닐 수 없다]로 지목하며 옹호한 글이 다음과 같은 문장으로 끝나는 이유이다.
뚜렷한 희망 없이 새롭게 한 해를 시작해야만 하는- 도대체 누구인지 모를- “우리”들에게 남겨진 과제, 그것은 “반항”이라는 외피까지 뒤집어 쓴 채 자신을 궁극적인 대안의 최대치로 치켜세우는 “겸손한 사유”란 개념의 ‘오만’을 꿰뚫어보는 것을 넘어, 그것의 대립항으로 설정된 “광기의 혁명”이라는 양자택일 ‘사이’에 난, 혹은 아직 보이지 않는 작은 길, 혹은 실처럼 얇지만 그 밑에 무저갱의 잠재력을 숨기고 있는 크레바스(crevice)를 알아보는 것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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