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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剛山도 息後景 - 풀잎처럼 눕자

햇살처럼 가족방/금연의 추억

치열하지 않은 고요는 없다./220427

서까래 2022. 4. 28. 15:58

치열하지 않은 고요는 없다.

 

적멸(寂滅)이란 개념은 불교에서는 아주 소중한 개념으로 쓰인다.

 

이하 내용은 하단에 실는다.

 

2008410()

 

"오늘 드디어 금연을 감행하다.

이번에는 반드시 성공하여 다시는 흡연자가 되지 않으리라."

 

14년 전 금연을 시작하면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짧게 적어놓은 나의 금연일기이다.

 

그리고 다시는 흡연자가 되지 않았다.

따지고 보면 치열하게 살아온 삶만큼이나

담배도 치열하게도 피웠다.

 

그때는 그랬다.

지금도 거의 그렇지만 그저 일에 파묻혀

도심 속의 은둔자처럼 살았고,

 

그런 내게 술과 담배는 너무나 가까운 벗이었다.

그리고 담배는 술과는 달리 시도 때도 없이 나와 함께했으니

그 애틋함이 오죽했겠는가?

 

그런데 지나고 보니 미친 짓이었다.

가장 가까운 벗이라 여겼던 담배가

악마의 달콤한 유혹에 불과했다는 것을 금연한 후에야 알았다.

 

그런 미친 짓도 치열하게 했으니,

결별하는 과정인들 어찌 치열하지 않았겠는가?

 

하지만 금연자들에게는 비흡연자들은 알 수 없는

나름대로의 까달음도 있다.

 

그때는 바쁘고 힘겨운 시기였지만

멋진 금연동지들을 만나 함께하며 행복했던 시기이기도 했다.

 

그리고 되돌아보면 그때만 해도 젊었다.

젊었어~~~

 

치열하게 금연하던 시절 "치열하지 않은 고요는 없다"라는 글을 접하고

심히 공감을 했고

가끔씩 끄집어내어 읽어보는 글이다.

 

만보기를 보니 아침운동을 시작한지 오늘로 300일이 되었다.

 

지금까지 총 5,132,182보에 거리로는 3,490km를 걸었다.

 

하루 1만보 이상, 하루평균 10키로미터 이상씩 걷자는

나와의 약속을 나름 잘 지키고 있다.

 

작년 주말 어느날 하루를 빼고는 지금껏 하루도 거르지 않았다.

집에서 격리치료 시에도 방안에서

감옥에서의 빠삐용놀이를 하며 1만보 이상을 걸었다.

 

아내는 피곤하면 좀 쉬지 뭘 그렇게 목숨을 걸고 하느냐고

핀잔을 주기도 하지만,

 

하루이틀 거르다보면 버릇이 되고 습관이 되고,

결국은 유야무야가 된다.

 

이를 경계하는 것이다.

 

먼 훗날 염라대왕 앞에 섰을 때 네가 살아오면서

잘 한 일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50세가 되어서는 좋아하던 담배를 끊었고,

어제 아침까지 아침운동 겸 산책을 하루도 거르지 않고 꾸준히 해왔으며,

어제 저녁까지 모시고 사는 마나님의 시중을 들었나이다 라고 말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희망사항이 담긴 다짐이다.

 

안과에를 가봐야 할 모양이다.

아직 업무를 보는데는 지장이 없으나

늙어가는 아내가 갈수록 이뻐보이는 것은

나이들어 시력이 심히 떨어진 탓임을 내 어찌 모르겠는가?

 

날씨가 너무 화창하고 좋아서 씨잘데기없는 헛소리가 나오나 봅니다.

 

이제 4월도 막바지를 향해 치달리고,

5월의 꽃 아카시나 넝쿨장미가 꽃봉오리를 공구고 있습니다.

 

얼마 남지 않은 4월 미련없이 알뜰하게 잘 보내시길 빕니다^^

 

(음표)투코리언스의 "젊었다"

https://youtu.be/lfE8PU72wVE

 

(음표)김수철의 "젊은 그대"

https://youtu.be/AZUw_aIZqf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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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열하지 않은 고요는 없다

 

적멸(寂滅)이란 개념은 불교에서는 아주 소중한 개념으로 쓰인다.

그래서 적멸을 낙으로 삼는다(寂滅爲樂)’고 말하기도 한다.

 

적멸은 번뇌가 소멸된 고요한 상태, 평화로운 상태를 의미한다.

말하자면 삶의 이상적 모습을 그렇게 말하고 있다.

 

우리의 통상적 이해방식에서는 적멸은 그냥 조용한 것으로,

그냥 가만히 있는 것으로 알고 있지만 실은 그렇지 않다.

 

가령 천지가 조용한 적막강산에 들어 앉아 있어도

내 속이 시끄러우면 결코 고요할 수 없다.

또 바깥세상이 어떻든

내 마음만 고요하면 그만이라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결코 고요해질 수 없다.

 

내가 해야 할 바를 하지 않고

또 하지 않아야 할 짓을 해 놓고

그렇듯 내 인연들이 오염되어 있는데

내 마음이 고요할 수는 없다.

 

번뇌를 벗어날 수 없다.

 

그러니까 고요하다는 것은 가만히 있는 것이 아니다.

조용한 곳에 들어 앉아 있다고 해서

내 삶이 고요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적멸이 구해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가령 자전거를 탄다고 하자.

가만히 있을 수가 없다.

가만히 멈추어 서려면 이리 비틀 저리 비틀하다가 쓰러질 것이다.

가만히 있고자 해서는 결코 고요할 수 없다.

 

그리고 바퀴가 천천히 굴러가면 바퀴살이 다 보인다.

이도 고요한 것과는 거리가 멀다.

그러나 아주 빨리 달리면

바퀴살이 보이지 않고 그냥 바퀴만 보인다.

마치 가만히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것을 두고서 고요하다는 표현을 쓴다.

그러니까 고요하다는 것,

그냥 조용하다는 개념이 아니다.

 

치열하게 전진하는 삶,

그 속에서 번뇌와 망상이 자리할 여지가 없을 때

고요하다고 말하는 것이다.

정말 고요한 것은 치열함에서만 나온다는 그런 이야기다.

 

머무는 바 없이 머물러야 한다는 것도 같은 맥락의 이야기다.

 

삶의 품격은 얼마만큼 고민하느냐,

얼마만큼 치열하냐에 따라서 정해진다.

치열하지 않고 고민하지 않는 삶은

구차하고 비루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삶은 치열할 것을 요한다.

 

치열하다는 것이 무엇인가?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

생각과 행동을 일치시키고 그 일관성을 지켜가는 것,

그것을 치열하다고 한다.

 

그리고 번뇌, 망상이 자리할 여지가 없고

잡스러움이 없을 정도로 치열한 삶,

그것을 고요하다고 한다.

 

공자는 사십에 불혹(不惑)’이라고 했다.

이도 다른 이야기가 아니다.

초지일관할 수 있었다는 것,

그렇게 지행합일에 있어서 치열했기에

달리 어떤 의혹도 없었다는 이야기다.

 

공자는 사십에 불혹이라고 했는데,

우리 세간사 인생은 의혹만 늘어간다.

 

하늘은 의미 없는 생명을 낳지 않고

땅은 의미 없는 목숨을 기르지 않는다고 한다.

풀 한 포기도 의미 없는 목숨이 없는데,

우리네 인생이 아무 의미 없이 아무 생각 없이 떠돌다가

마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래서 늘 생각하고 고민하고 또 행동해야 한다.

생각하지 않고 행동하지 않으면 죽은 것이다.

또한 생각만 하고 행동을 안 해도

거의 죽은 목숨이나 다를 바 없다.

 

적멸이란 개념도 불혹이란 개념도 밀어두기로 하자.

그러나 이것만은 다시 확인하자.

치열하지 않은 인생, 서툰 인생,

대충 사는 인생은 절대 성공할 수 없다는 것을.

 

치열하다는 것은 자신이 마주하는 문제를 비켜가지 않고

정면으로 맞부딪치는 것이고

그 문제의 한가운데에 자신을 던지는 것이며

그리하여 끝내 그 문제를 소화하고 해결하는 것이다.

 

배영순의 방하한 생각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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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에 지인들에게 보낼 카톡에 우연찮게 금연에 관한

얘기가 나와서 불현 듯 예전에 들락거리던

금연길라잡이가 생각나서 로그인을 하려했더니,

하도 오랜만이라서 그런지 아이디 찾기도 안 되고,

비밀번호 찾기도 안 되어서 어쩔 수 없이

회원가입을 다시 했는데,

아이디와 닉네임은 중복된다고 하니 참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금길사이트에 문제가 있는 건 예나 지금이나 매 한가지인가 봅니다.

 

그래도 이왕 마음먹은 김에 신입으로 회원가입해서

그냥 아침에 지인들에게 보냈던 글 그대로 올려봅니다.

그 시절 금연하며 만난 분들 중에 두어분 정도는

절친하다면 매우 절친한 벗처럼 지금도 소식을 주고받으며 삽니다만

함께했던 많은 분들은 지금 어찌 지내시는지 궁금하기 짝이 없습니다.

 

지나고 보면 치열하게 금연하던 그 시절이 좋았다는 생각도 듭니다.

금연은 누구에게나 힘겹고 지겨운 싸움입니다.

하지만 고통은 순간이요, 기쁨은 영원합니다.

 

잊고 살았던 옛 고향집에 들른 느낌입니다.

기회가 되면 다시 방문할 수도 있겠지만, 언제일지는 알 수가 없고,

혹시 댓글을 다시는 분들에게 답 글을 못하더라도

무례하다 나무라지 않으셨으면 좋겠습니다.

 

모두 건금하시어 반드시 금연자의 길로 들어서시기를 기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