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이 왔어요^^
밤새 눈이 내렸습니다.
새벽에 아파트에서 내려다보니
겨우 바닥을 덮을 정도로 내렸다 싶었는데,
막상 밖으로 나와 차에 쌓인 눈을 보니
3센치미터 내외의 눈이 내렸지 싶더라고요.
이곳의 기온이 그다지 높지 않아서
포장된 바닥에 쌓인 눈들은 대부분 녹았는데,
영산강을 가로지르는 다리는 꽁꽁 얼어붙어서
집 가까이에 있는 다리 하나를 건너는데
한 시간 가까운 시간이 걸리더군요.
눈이 많이 내리고 한파까지 밀려온 수도권과
중부지방의 교통상황은 아마 심각하지 싶습니다.
이곳 광주는 온 세상이 하얗게 변할 정도로
눈이 많이 내린 건 아니지만
첫눈이라고 불러도 손색없을 정도의 눈이 내렸습니다.
문득 초등학교 교과서에 실렸던
“하얀 눈이 내렸어요
밤새도록 내렸어요,
장독에도 지붕에도 소복소복 쌓였어요.....”
이러한 느낌의 눈에 대한 글이 있었는데
오래된 글이라 글 내용이 생각나지 않아 검색하다가
우연히 도종환 시인이 쓰신 “생의 한파”란 글을 접했는데,
혼자보기는 아까울 정도로 글의 내용이 너무 좋아서
보내드리고 싶은데,
글이 조금 긴 편이라서 아래쪽에 실어 보내오니
바쁘신 분들은 패스하시고
시간 나시는 분들은 한번 읽어보시는 것도 괜찮지 싶습니다.
눈도 내리고 추위도 밀려오니
이제 겨울 같은 느낌이 듭니다만
그만큼 건강에 유의하셔야할 시기입니다.
오늘도 건강과 행복이 함께하는 하루되시길 빕니다.
(음표)송창식의 “밤눈”
(음표)이숙의 “눈이 내리네”
*** 생의 한파 / 도종환
고드름 떨어지는 소리가 들립니다.
고드름은 여러 도막으로 부서지며 새벽을 깨웁니다.
나도 그 새벽과 함께 혼자 조용히 눈을 뜹니다.
창문을 열지 않았는데도 창을 통해 들어온 냉기가
방안을 휘젓고 다닙니다.
벽난로에 불을 붙일까 하다 그냥 둡니다.
겨울 아침의 서늘한 기운은 이것대로 느낌이 좋습니다.
어릴 때 우리가 맞았던 아침도 이런 아침이었습니다.
찬물에 손을 담갔을 때의 시리고 따끔거리던 감촉을
생각합니다.
가마솥에서 끓는 물 한 바가지를 떠다가 섞으며
미지근해져오는 물을 만질 때의 그 아늑함을 생각합니다.
따뜻한 물 한 바가지의 귀함과 고마움을 그때처럼
소중하게 느낄 때가 또 있을까요.
세수를 하고 들어오다 문고리를 잡았을 때
손에 쩍 하고 달라붙던 냉기의 느낌은
참 오랜 기억으로 살 속에 남아 있습니다.
마당에도 눈이 쌓였고 지붕에도 눈이 쌓였고
장독대에도 눈이 하얗게 쌓였습니다.
내가 배웠던 초등학교 1학년 국어 책에는
<눈>이라는 단원이 있었습니다.
“눈이 왔어요. 하얀 눈이 왔어요.
나무 가지도 하얗고, 기와지붕도 하얗고, 눈이 왔어요.
밤새 몰래 왔어요.
소복소복 쌓였어요.
장독 위에 쌓였어요. ”
누나, 저것 보아. 눈이 많이 왔지?
우리 눈사람 만들까?”
이런 글이 있었습니다.
그때 소리 내어 읽던 눈에 대한 구절들이 떠오릅니다.
참 오래된 기억인데 아직도 그때의 목소리가
기억의 한 구석에 남아 있습니다.
그 1학년 국어책에는 눈 쌓인 창밖 풍경이
그려져 있었습니다.
책의 삼분의 이 정도가 그림이었는데,
낮은 꽃담의 눈 쌓인 기와 아래 크고 작은 장독이
사이좋게 눈을 머리에 이고 서 있고,
두 그루의 나무 사이에 몇 마리 참새가 날고 있었습니다.
그때 읽었던 눈은 교과서 속의 눈이 아니었습니다.
눈이라고 소리 내어 읽는 동안 눈의 하얀 색깔이
고스란히 살아나고 눈의 차가운 느낌이
손 안에 그대로 잡히는 눈이었습니다.
눈사람이라고 소리 내어 읽을 때 그 눈사람은
어제 직접 눈을 궁글려 만든 눈사람이었고
아직도 문 앞에 세워 두고 온 눈사람이었습니다.
눈사람의 몸 군데군데 흙도 묻어 있고
연탄재도 조금 섞여 있는 눈사람이었습니다.
한 줄을 읽는 동안 생생하게 떠오르는
하얀 눈이고 눈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언제부턴가 우리는
그렇게 생생하게 살아 있는 눈,
살에 와 직접 닿던 겨울바람으로부터
점점 멀어지기 시작하였습니다.
눈보라를 뚫고 벌판을 가로질러 가지 않고,
눈을 맞으며 거리를 거닐지도 않습니다.
눈사람을 만들지도 않고 눈을 뭉쳐 좋아하는
사람에게 던지며 눈싸움을 하지도 않습니다.
진눈깨비에 젖으며 보고 싶은 사람을 만나러 가지 않고,
칼바람에 머리칼을 맡긴 채 하염없이 걸어가지 않습니다.
우리는 거리에 있지 않고 창 안에 있습니다.
방 안에서 눈 내리는 풍경을 바라보거나
눈이 내리는 동안 사무실 안에서
하루 종일 일을 하고 있습니다.
눈이 온다고 창밖으로 달려가지 않고
눈을 몰고 다니는 바람의 찬 기운이 새어들어 올까봐
창문을 꼭꼭 닫고 있습니다.
눈 그 자체를 좋아하기보다는
눈이 온 풍경을 즐길 뿐입니다.
눈은 그저 풍경으로 있을 뿐입니다.
그 배경 위에 내가 아름다우면 그것으로 만족합니다.
눈을 좋아하고 바람을 좋아하는 것은 아닙니다.
더구나 눈이 내게 고통을 주거나 불편하게 하면
그대로 두지 않습니다.
오직 실용적인 시각으로 눈을 바라볼 뿐입니다.
우리는 쾌적하고 안온한 실내에 있는 것을 원합니다.
우리의 몸은 편안하고 따뜻한 것을 원합니다.
쾌적하고 평온한 시간과 공간 속에서 지내야 하도록
이미 길들여져 있습니다.
가능한 손을 많이 움직이지 않아도 되고
모든 것이 자동으로 처리되어 있는 생활에
길들여져 가고 있습니다.
일용할 양식과 넉넉한 먹을거리가 보장되는
생활에 익숙해져 있고
거기에 잘 적응하도록 설계되어 있습니다.
이런 환경에 자발적으로 속박되길 원하고,
안정된 상태가 오래오래 지속되기를 소망합니다.
그러던 어느 날 뜻하지 않게
벌판으로 팽개쳐지면 우리는 어떻게 될까요?
고통 없는 온도에 길들여져 있던 우리의 피부는
갑작스러운 한파를 어떻게 이겨내야 할까요?
일자리를 잃었다거나 가정을 버리고
나와야 하는 일이 벌어진다면 우리는 어떻게
바람 부는 거리의 삭막함에 자신을 적응해 나가야 할까요?
주어지는 먹이가 아니라 스스로 먹을 것을 찾아야 하고
따뜻한 잠자리가 아니라 한파가 몰아치는
거리의 어디쯤에다 정처를 잡아야 할 때,
우리를 엄습해오는 눈보라보다 더 큰 좌절과
낭패감과 막막함에 고개를 들 수 없을 때,
어떻게 그것들로부터 우리를 지켜야 할까요?
저도 몇 해 전에 그런 심정이었습니다.
두 번이나 휴직을 하면서 직장의 끈을 붙잡고 있다가
그것을 놓아야 했을 때 저도 그런 심정이었습니다.
몸은 온전치 못하고, 마음도 균형을 잃은 채
밥벌이도 제대로 할 수 없는 처지였습니다.
퇴직금이라고 가지고 나온 돈은
네다섯 달 월급 정도밖에 되지 않았습니다.
그것들이 시간과 함께 푸석푸석 바람에 날려 흩어지는 걸
바라보며 바람 매섭게 몰아치는 산기슭에서
다만 말없이 견디며 있었습니다.
환경이 바뀌면서 생활방식도 바뀔 수밖에 없었습니다.
내 손으로 쌀을 씻어 밥을 지어야 했고,
텃밭에 푸성귀를 심어 먹을거리를 마련해야 했습니다.
얼어 죽지 않으려면 지게를 지고 나무를 하러 다녀야 했고,
그 나무를 도끼로 쪼개 불을 때야 했습니다.
장작불의 온기로 창밖의 겨울바람을 이길 수 없는 날은
수은주를 점점 아래로 끌어내리는 냉기 속에서
웅크리고 자야 했습니다.
끼니를 세끼에서 두 끼로 줄여야 했고,
반찬 가짓수를 하나씩 줄여가야 했습니다.
그러나 내가 먹을 한 그릇의 밥을 내 손으로 지어먹으며
나는 새로운 삶에 눈 뜨기 시작했습니다.
우선 검소하고 간결한 삶이 찾아왔습니다.
내가 먹을 것을 내 손으로 만들어 먹으면서
낭비하지 않고 소박하게 사는
삶의 기쁨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지금까지 유지되어 오던 자신이 서서히 해체되고
새롭게 나타나는 또 하나의 나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지극히 자본주의적인 욕망에 멱살을 잡혀 끌려 다니던
자아가 조금씩 지워지고 작업복 바지 하나로도 편안한
새로운 자아가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무엇보다 내 삶의 주체가
바뀌고 있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지금까지 내 삶을 지배하던 것과는
근본부터가 다른 새로운 삶의 주체가
생겨나고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모리오카 마사히로가 말하는 <느닷없는 기쁨>,
<생명의 기쁨>이 바로 이런 것인지도 모릅니다.
“이 때 다가온 느닷없는 기쁨,
이제까지 몰랐던 새로운 자신이 내면으로부터
꽃을 피워 상쾌한 바람을 맞는 것처럼 다시 태어나는 기쁨,
이것이 ‘생명의 기쁨’”이라고
모리오카 마사히로는 말합니다.
그는 생명에 대해 이렇게 덧붙입니다.
“생명이란 신체에 내재하면서 신체를 넘어서는 것이다.
생명은 신체에서 결코 벗어날 수 없다.
그런 의미에서 생명은 신체의 일부이지만
신체라는 틀을 뛰어넘어 먼 밤하늘로 넘어가려고 한다.
생명이란 신체를 넘어서려고 하는 신체다.
그 때마다 생명의 힘은 신체의 틀을
안에서부터 바꾸어 놓고, 그 때문에
예기치 않은 생명의 기쁨이 나타난다.
생명의 기쁨은 내가 얻으려 한다고
얻을 수 있는 게 아니다.
고통과 직면해서 나를 바꿔가는 중에
‘예기치 않은 형태’로 나에게 다가온다.”
그렇습니다.
신체의 욕망에 갇힌 채 새로우면서도 쾌락적인 것,
자극적이면서도 크고 많은 어떤 것을 찾아가다가
만나는 흡족함과 이 기쁨은 다릅니다.
고통을 최소화하고 편안함만을 추구하는 육신이
본능적으로 움직여 가는 길과 생명의 길은 다릅니다.
이 기쁨은 고통 속에서 만나는 기쁨입니다.
고통을 만나 그 고통 속에서 나를 해체하고
다시 태어나면서 만나는 기쁨입니다.
찬물에 손을 담그며,
땀을 흘려 일을 하며,
험한 길을 걸으며,
내 하루치의 목숨에 대해
뼈저리게 생각하며 내 삶의 주체를 바꿔가는 동안
내게 찾아오는 기쁨입니다.
겨울 찬바람에 감사합니다.
눈 녹은 물을 얼게 하고 고드름으로 벌을 세우며
채찍질 하는 혹독한 밤공기에 감사합니다.
방안의 물까지 얼려 버리고 손을 갈라터지게 만드는
냉기에 감사합니다.
나를 언제든지 더 험한 벌판으로
내팽개칠 수 있다는 걸 알려주는 겨울에 감사합니다.
‘언제든지 지금까지 누리던 편안함을 버리고
새로운 세계를 찾아 나서라, 거기 불안과 함께
더 큰 기쁨이 기다리고 있다’고 말해주는
시련의 계절에 감사합니다.
감사하고 다시 감사하며
차가운 새벽빛에 이마를 씻습니다.
-도종환 산방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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