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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까래 2010. 3. 15. 12:50

[6화] 모악산①편 [미륵신앙의 성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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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인의 아미처럼 곱디고운 서쪽 지평선을 뒤로하고 탁 트인 호남평야를 달리다보면 별안간 산맥이 우뚝 가로막는다. 사방 백리가 넘는 평지에 가파르게 치솟아 호남정맥(湖南正脈)을 이루니 해발 793m 국사봉을 머리로 이고 있는 모악산(母岳山)이다.

모악산은 ‘평지돌출산’이다. 사방이 탁 트인 평지 돌출산은 선각자들의 보금자리다.
모악산은 ‘고려사’까지만 해도 ‘금산(金山)’으로 기록되어 있었다. 산 이름은 고찰에서 유래하는 경우가 많기에 ‘금산사(金山寺)’에서 연유했다고도 하고, 사금(砂金)이 많이 나기에 붙여진 이름이라고도 한다.

◇ 미륵신앙의 메카 금산사

어떤 이는 정상 근처의 쉰 길 바위의 형상이 어머니가 아이를 안고 있는 형국이라 하여 ‘엄뫼’라고 부르다 금산으로 의역, 음역되었다고 하나 왜, 그리고 언제부터 모악이 되었는지 확실하지 않다. 다만 주변 지명이 여전히 금구면(金溝面), 금평(金坪), 김제(金提)로 불리며 금산(金山)의 흔적을 간직하고 있다.

모악산은 미륵의 땅이다. 모악산엔 미륵신앙의 메카 금산사가 있으며, 세상이 어지러우면 사람들은 여지없이 모악산에 모여들어 사회변혁의 이상을 충전해 갔다. 모악산은 이상세계를 꿈꾸는 수많은 인간 미륵을 품었다. 진표율사, 후백제의 견훤, 기축옥사의 정여립, 한국 불교 최고의 기승 진묵대사에서부터 근세의 전봉준, 증산 강일순, 보천교 차경석, 원불교 소태산, 대순진리회 조철제, 증산도의 안경전 등이 이 지역에서 태동했고 선도교, 태을도 등 증산계열만 해도 100여 개 종단이 난립했다.

그들 중에는 금산사 미륵의 현신임을 자처한 이도 있으며, 전용해의 백백교는 세상에 물의를 일으키기도 했다. 과연 미륵의 땅인 모악산의 주인공은 누구였을까.

나그네는 금산사 쪽에서 출발해 전주를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금산사 들어가는 사거리에 앞 뒤로 ‘해원(解寃)’ ‘상생(相生)’이라고 새겨진 거대한 돌비석이 장승처럼 나그네를 맞이했다. 강증산은 모악산을 가리켜 ‘신도안의 계룡산은 수탉이고 모악산의 계룡봉은 암탉인데, 이 암탉이 진계(眞鷄)’라 하였다. 흔히 풍수지리가들은 모악산의 형상을 오공비천혈(蜈蚣飛天穴)이라 한다.

오공(蜈蚣)이란 지네를 말한다. 모악산 정상에서부터 산이 겹치면서 아래로 구불구불 급하게 뻗은 모양이 지네가 높은 데서 낮은 데로 내려오면서 머리를 쳐든 형국이라 그렇게 부른다. 그 오공비천혈 최고 혈자리에 금산사가 자리 잡고 있다.

599년(백제 법왕1)에 창건돼 1400년이 넘은 금산사는 송광사와 더불어 동양 최고의 사찰로 수많은 말사를 거느리고 있는 미륵신앙의 성지다. 금산사는 임진왜란 때 전소되었으나 인조 때 재건되었고 지금도 석련대, 당간 지주, 석종, 각종 탑 등 보물이 즐비하다. 미륵신앙은 미륵보살이 주재하는 도솔천에 태어나기를 원하는 상생신앙과 말세를 구제하러 미륵이 내려오기를 바라는 신앙으로, 이상사회를 제시하는 미래불인 미륵을 믿는 불교적 이상 사회관이다.

미륵의 금산사에는 백제의 혼이 깃들어 있다. 미륵신앙은 신라와 백제에서 국가의 통치 이념이었기에 양국은 치열한 자웅을 겨루지 않을 수 없었다. 백제는 금산사와 함께 익산 미륵사를 세워(601) 왕권을 강화했다. 이에 맞서 신라 선덕여왕은 황룡사에 거대한 9층 목탑을 짓는다(645).

백제와 신라의 치열한 미륵전쟁에서 백제가 멸망(660)하자 익산의 미륵사는 서서히 쇠락했다. 그러나 모악산의 금산사는 백제가 망한 뒤에도 복신, 도침과 의자왕의 아들 부여 풍(扶餘 豊)이 중심이 된 백제 부흥운동의 한 거점이 되었다.

금산사의 백미는 역시 웅장한 미륵전이다. 미륵전의 겉모습은 3층으로 되어있고, 내부에는 층이 없는 한 통이며 동양최대의 실내입불인 미륵불을 봉안하고 있다. 백제는 정복자인 신라에 의해 철저하게 지워졌기에 지하에 잠자던 공주의 무녕왕릉마저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면 금산사는 거의 유일한 백제 유적이 될 뻔했다. 미륵전 건축에 전해지는 설화는 얼마나 어렵사리 백제 혼을 되살렸는지 엿보게 한다.

백제 부흥운동이 실패(663)하고 꺼져가는 금산사를 중창한 건 진표율사(眞表律師)였다. 진표율사는 패망한 나라 백제의 김제평야에서 태어나(734) 12세에 금산사로 출가한다. 진표율사는 부안 내변산 꼭대기 천 길 낭떠러지 모퉁이에서 찐쌀 스무 말을 가지고 죽음을 각오하고 정진한다.

백제 부흥군이 마지막으로 완강히 저항하던 곳이 주류성(周留城)이다. 주류성의 위치에 대해 논란이 있지만 대체로 지금의 부안군 우금산성(울금산성)이라고 알려지고 있다. ‘삼국유사’에는 진표율사가 미륵불을 친견하고 깨우침을 얻은 곳을 ‘부사의방(不思議方)’이라 기록하고 있는데 그곳은 다름 아닌 주류성 길목이었다. 마지막 백제 부흥군이 처참하게 스러져간 곳에서 미륵불의 계시를 받은 것이다. 진표율사는 부사의방에서 계시를 받은 후에 금산사로 돌아와서 미륵전을 짓기 시작한다.

◇ 백제의 멸망으로 쇠락한 미륵사

금산사에 커다란 연못(방죽)이 있었다. 진표율사가 이를 메우고 미륵장존불을 조성하려는데, 이상하게도 흙으로 메우면 다음날 어김없이 다시 파헤쳐지곤 했다. 연못에 사는 용이 파헤친다는 것이었다. 이때 지장보살이 현신하시어 진표율사에게 숯으로 연못을 메우면 용이 떠날 것이라고 방도를 알려 준다. 하지만 연못을 메우려면 어마어마한 양의 숯이 필요했다.

그때 갑자기 마을에 눈병이 창궐했다. 진표율사는 묘안을 냈다. 누구든지 연못에 숯을 한 짐 쏟아 붓고 그 물로 눈을 닦으면 낫는다고 널리 알렸다. 연못은 순식간에 숯으로 메워졌고, 신기하게 눈병도 말끔히 나았다. 1985년 미륵전 보수공사를 위해 굴착기로 땅을 팠더니, 실제로 검은 숯이 나왔다고 한다.

임진왜란 후 만들어진 지금의 미륵불은 진흙으로 만든 소조불(塑造佛)이다. 하지만 처음엔 쇠로 만든 철불(鐵佛)이었다고 한다. 금산사 미륵불이 만들어지기 이전의 불상들은 주머니에 넣고 다닐 정도의 작은 크기의 반가사유상이 대부분이었다. 그런데 왜 이렇게 큰 대불(大佛)을 조성했을까. 그리고 왜 하필 대불은 수많은 부처 중 미륵불이었을까.

금산사 미륵불은 소수 귀족층의 밀교에서 민중불교로 전환되었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소승불교에서 값비싼 금은으로 만든 작은 불상을 귀족들이 혼자 모시며 예불을 드렸다면, 대불은 누구나 친견할 수 있어 누구의 소유도 아닌 우리들의 부처를 뜻한다. 아무리 높은 계급이라도 거대한 부처 아래 평등함을 상징하고 있다. 부처의 눈엔 이미 부처와 중생이 따로 없음을 보여주고 있다. 미륵전 자리를 십시일반 숯을 날라 메웠던 일화에서 짐작하다시피, 철불을 만들 때도 민중들이 하나씩 불사한 숟가락 같은 쇠붙이들을 한데 녹여 모두의 부처님으로 현신시켰을 것이다. 이렇게 하여 미륵신앙은 소수 귀족계층에서 온 백성의 미륵으로 거듭났다.

금산사는 부처님의 진신사리를 모시고 있다. 금산사 경내의 송대(松臺)에 5층 석탑과 나란히 위치한 석종(石鐘)은 종 모양의 석탑이다. 고려 초에 조성된 걸로 추정하는 석종은 매우 넓은 2단의 기단(基壇) 위에 사각형의 돌이 놓인 방등계단(方等戒檀) 위에 세워져있다.

호남의 모든 사찰이 신라 승려나 왕족들이 창건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으나, 금산사만은 백제 사찰임을 분명히 명기하고 있다. 백제 왕족의 복을 비는 것으로 창건된 금산사임에도 불구하고, 백제 법왕의 창건임을 밝힌 이유는 백제 유민들을 회유하기 위한 정략적인 포석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아니, 왕족이 아닌 민중들의 땀방울이 한 방울 한 방울 모인 미륵불을 무시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이렇게 금산사는 백제인의 정서를 대변하는 미륵의 성지로 면면히 백제의 혼을 이어나갔다. 200여 년 뒤, 백제는 다시 금산사에서 후백제로 부활한다(900).

※이 기사는 뉴시스 발행 시사주간지 뉴시스아이즈 제116호(1월26일자)에 실린 것입니다.

<[서울=뉴시스】 백제혼 깃든 금산사 미륵전, 온화미소 민중염원>





기사 출처 : 뉴시스아이즈 (2009-01-20)

   

[7화] 모악산②편 [인간미륵을 길러낸 땅]

<후백제의 성문인 홍예문. 후백제 44년에 축조한 금산산성이라는 전설이 전하며 금산사 입구 현 위치로 이전 복원했다.>

백성들은 민심이 흉흉할수록 현실보다 미래에 기대하는 미륵신앙에서 위안을 받고 대안을 찾으려 했다. 민중들의 염원이 모인 모악산은 모든 사회 변혁운동 이념의 산실이었다. 미륵신앙은 이상사회의 통치이념으로 또는 민족종교로 변신하며 시대에 따라 옷을 갈아입었다.
견훤은 스스로 환생한 미륵임을 자처하며 완산주(지금의 전주)를 도읍으로 후백제를 세워 왕이 된다.(900)
견훤은 모악산 금산사(金山寺)를 자신의 복을 비는 사찰로 삼고 중수하여 백제의 계승자임을 선포한다. 견훤은 중국의 오(吳)·월(越)과 통교를 하는 한편 영토를 확장하였고 신라의 경주를 공격하여 경애왕(景哀王)을 죽이고 경순왕(敬順王)을 세우는 등 막강한 백제 재건에 성공한다.

◇ 시대를 앞서간 선각자 정여립

그러나 후백제는 너무 짧았다. 내부 분열로 부흥운동마저 실패했던 백제의 전철을 후백제도 그대로 답습하고 말았다. 견훤은 넷째아들 금강(金剛)에게 왕위를 물려주려하지만 이를 시기한 다른 아들들이 견훤을 금산사에 가두고 금강을 죽인 다음, 신검(神劍)이 왕위에 오른다. 3개월 후, 금산사를 탈출한 견훤은 고려로 망명, 태조와 협력하여 10만 대군으로 후백제를 총공격했고, 격전 끝에 후백제는 고려에 굴복, 936년에 멸망하고 말았다.

이상세계를 향한 꿈은 사그라질 줄 몰랐다. 1546년 모악산 부근 금평 저수지 위 구릿골에서 태어난 정여립(鄭汝立)은 영국의 정치가 크롬웰보다 50년이나 더 앞서 공화정(共和政)을 주장한 걸출한 선각자였다. 통솔력이 있고, 명석하였으며, 경사(經史)와 제자백가에 통달했던 정여립은 24살에 과거 급제하여 십수 년간 순탄하게 벼슬길에 오른다.
그러나 유학의 계급관료적인 폐단을 꿰뚫은 정여립은 왕권 체제 하에서 도저히 용납될 수 없는 혁신적인 사상을 품는다. ‘요임금이 순임금에게 왕위를 물려줄 때 혈통세습이 아닌 능력세습’이라며 왕권의 세습을 반대하였고, ‘천하는 일정한 주인이 따로 없다’는 천하공물설(天下公物說)과 ‘누구라도 임금으로 섬길 수 있다’는 하사비군론(何事非君論), 그리고 신분철폐를 주장한다.

너무 시대를 앞선 탓일까. 정여립은 선조왕의 미움을 사 관직을 떠나게 된다. 낙향한 정여립은 구릿골 일대 제비봉을 중심으로 대동계(大同契)를 조직해 매월 보름날에 활을 쏘고 무예를 익히며 잔치를 베풀었다. 대동계원은 양반, 상놈, 승려 등 신분귀천이 없었다. 대동 계원 스스로 향토를 방어할 수 있는 군사훈련도 병행했다. 지금으로 치자면 향토방위대쯤 된다. 왕조 속에서도 모악산에 작은 공화국을 건설한 셈이었다.
정여립은 백제나 후백제가 세습 신분 계급을 근간으로 하는 왕조라는 한계 때문에 미륵 세상을 건설할 수 없다고 판단했을지 모른다. 신분이 아니라 개인 능력에 따라 등용하며, 민중들의 뜻에 따라 움직이는 공화국이 정여립이 꿈꾸는 미륵 세상이었다.

1587년(선조 20) 왜군이 손죽도로 쳐들어오자, 정여립은 전주 부윤 남언경의 협조 요청을 받아들여 대동계를 즉각 출동해 왜군을 물리친다. 그러나 이것이 화근이 되고 말았다. 군대의 출동은 조정에 보고되고, 대동계를 중심으로 역성혁명을 준비한다는 의심을 받기 시작했다. 백성들 사이에선 벌써 ‘이가(李家)는 망하고 정가(鄭家)는 흥한다’는 정감록이 횡행했다.

1589년(선조 22) 황해도 관찰사, 안악군수, 재령군수 등이 연명하여 ‘정여립 일당이 한강이 얼 때를 틈타 한양으로 진격하여 반란을 일으키려 한다’고 고발하였다. 관련자들이 차례로 잡혀가자, 정여립은 아들 옥남(玉男)과 함께 죽도(竹島)로 도망하였다가 관군에 포위되자 자살하고 만다. 무오·갑자·기묘·을사 4대 사화(士禍)를 합한 희생자보다 더 많은, 선비만 1000여 명이 처형당하는 피의 지옥이 연출되니, 이를 ‘기축옥사(己丑獄事)’라 한다. 이 사건을 계기로 전라도는 ‘반역향(叛逆鄕)’이라는 낙인이 찍혀서 등용에 제한을 당해야 했다. 이렇게 정여립의 거대한 미륵 세상 구현은 비극으로 끝나고 말았다.

무고한 원혼들의 저주였을까. 공교롭게도 3년 뒤인 1592년 조선은 비류의 백제가 세운 일본으로부터 침략을 받아 온 나라가 불타게 된다.(임진왜란)
임진왜란 때 호남평야를 지킨 것은 관군(官軍)이 아니라 의병(義兵)들이었다. 의병은 정여립이 대동계에서 조직한 향토방위대가 전신이었으니 역사의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근래 역사가들 중에는 정여립이 이이(李珥)의 ‘십만양병설’에 자극받아 임진왜란을 미리 준비했었는데, 조정에서는 이를 역모로 조작했다고 재평가하기도 한다.

금산사에서 서편으로 한 시간 가량 걸으면, 신라 문무왕 16년(676) 의상대사가 전주로 넘어가는 모악산 자락에 창건했다는 귀신사(歸信寺)가 나온다. 1992년 이상 문학상을 수상한 양귀자의 소설인 ‘숨은 꽃’의 무대가 바로 귀신사다. ‘그는 귀신사에 있었다. 나는 그를 귀신사에서 만났다’, 이렇게 시작되는 소설은 귀신사를 이렇게 소개한다. “영원을 돌아다니다 지친 신이 쉬러 돌아오는 자리. 이름에 비하면 너무 보잘것없는 절이지만 조용하고 아늑해서 친구는 아들을 데리고 종종 그 절을 찾는다고 했다.” 뒤뜰에 엎드려 앉은 사자상 위에 남근석이 올려진 돌사자상이 이채롭다.

모악산 동쪽 구이면 원기리에서 선녀폭포 쪽으로 가다보면 전주 김씨 시조묘 입구에 전주김씨 종가에서 세운 공덕비와 정자가 있다. 군사정권시절 이 묘는 공공연한 국가기밀로 접근이 금지되었다. 이곳을 찾으러온 풍수지리가들은 덩치 큰 사람들에게 봉변을 당하는 웃지 못 할 일이 벌어졌는데, 바로 김일성(金日成)의 32대 조상 김태서의 묘가 위치했기 때문이다. 일명 ‘김일성 조상묘’는 문민정부가 들어서기까지 접근 금지였다.

◇ 모악산에 자리한 ‘김일성 조상묘’

육관 손석우씨가 지은 ‘터’라는 풍수지리책에는 ‘이 묘의 지기가 발복하여 그 후손이 장기집권을 하게 되며, 그 운이 49년 만인 1994년 9월에 끝난다’라는 내용이 예언되어 있었다. 처음에는 이 내용을 믿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그러나 그 예언한 날짜와 근소한 차이로 김일성이 사망한 이후(1994년 7월)부터 세인들의 관심을 끌어, 모악산의 또 다른 명소가 되었다.

모악산을 동쪽에서 오르다보면 고려 밀교(密敎)의 본산지인 대원사(大願寺)가 나온다. 밀교의 특징은 불보살의 초월적인 가피력을 강조하는데, 병이 낫는다든지, 외적 침입을 격퇴한다든지 인간사의 각종 애환들을 치유한다. 강증산이 수도하여 도통했다는 대원사는 진묵대사(震默大師)의 자취가 여전하다. 진묵대사는 숱한 이적과 불가사의한 신통력을 보였으며 석가모니 부처님의 화신으로까지 일컬어질 정도로 한국 불교사상 가장 신비로운 스님이다.

진묵대사는 전주의 장날에 가서 동중정(動中靜)을 시험했는데, ‘오늘은 장을 잘 보았다’하면 북새통인 장터에서도 내면의 마음이 전혀 흔들리지 않은 것이고, ‘오늘은 장을 잘 못 보았다’하면 신통치 않았던 것이다. 곡차(穀茶)란 말도 진묵대사가 만들었다고 한다. 술을 좋아하던 진묵대사였지만, 같은 잔이라도 ‘술’이라하면 외면하다가 ‘곡차’라고하면 벌컥 들이켰다. 대원사에서 정상 쪽으로 도보 1시간 거리에 위치한 수왕사에는 지금도 송홧가루를 재료로 하는 송화백일주(松花百日酒)가 빚어지고 있고, 진묵대사가 술을 빚었던 도구들이 전해진다고 한다.
어느 날 어머니가 아들 진묵을 보러 찾아왔는데, 그만 해가 질 때가 되어 밤길이 걱정되었다. 진묵대사는 어머니를 따라 나서지 않고 산문(山門)에서 배웅했다. 그런데 분명히 서산으로 져야 할 해가 집에 당도하도록 수 시간동안 걸려 있었다. 어머니가 대문을 열자 해가 뚝 떨어져 사람들이 기이하게 여겼다.

진묵대사는 출가한 승려로서 대를 이을 손이 끊기어 그의 어머니 묘에 성묘할 사람이 없을 것을 염려하여, 어머니 무덤에 고사를 드리면 병이 낫고 부자가 된다는 말을 퍼뜨렸다. 효험이 입소문을 타자 오늘날에도 많은 참배객이 줄을 이어 이 무덤에 제사를 지내고, 400여년이 넘는 긴 세월 동안 잘 보존 되어 내려오고 있다.
후세들은 이 무덤 자리를 ‘무자손 천년향화지지(無子孫 千年香火之地)’ 즉 자손이 없어도 제사를 지내줄 사람이 1000년 동안 이어지는 명당이라 부른다.
<세상을 바꾸려한 이상향 꿈들, 무산됐어도 정신만은 절절이.>



※이 기사는 뉴시스 발행 시사주간지 뉴시스아이즈 제117호(2월9일자)에 실린 것입니다.


기사 출처 : 뉴시스아이즈 (2009-02-03)

 

 

 

 

[8화] 모악산③편 [문화예술의 젖줄]

수왕사에 모셔진 진묵대사의 영정. /뉴시스 아이즈
모악산이 품은 걸출한 인물들 중에 과연 누가 미륵의 세상을 펼쳤을까.
진묵대사와 같은 시대에 활약하던 유명한 승려가 서산대사인데, 혹자는 서산대사를 임진왜란을 승리로 이끈 호국불교의 상징이요, 진묵대사를 철저한 은둔자로 대비하기도 한다. 그러나 다음과 같은 진묵대사의 일화는 미륵 세상을 구현하는 또 다른 차원의 ‘천지공사(天地公事)’를 엿보게 한다.

하루는 진묵대사가 저명한 유학자 김봉곡(金鳳谷)에게서 성리학을 집대성한 ‘성리대전(性理大全)’을 빌렸다. 하지만 봉곡은 곧 크게 후회했다. ‘진묵은 불법을 통한 자인데, 만일 유도(儒道)까지 정통하면 대적하지 못하게 될 것이요, 또 불법이 크게 흥왕하여지고 유교는 쇠퇴하여지리라’며 급히 사람을 보내어 그 책을 도로 찾아오게 했다. 봉서사 산문(山門) 어귀에 이르기까지 한 권씩 떨어져 있는 책을 모두 주워 거두어갔다.

◇ 유학에까지 통달했던 진묵대사

나중에 봉곡이 책의 내용을 물으니 진묵대사는 한 줄도 틀리지 않고 줄줄 외웠다. 산문에 이르는 동안 이미 책을 모두 독파하여 그때마다 한 권씩 버린 것이다. 이를 시기한 봉곡이 진묵대사가 깊은 삼매에 빠져있을 때, 유체 이탈한 진묵대사의 육신을 그만 화장해버렸다. 허공에서 진묵대사의 음성이 들려왔다.
“내가 각 지방 문화의 정수를 거두어 모아 천하를 크게 문명케 하고자 하였으나 이제 봉곡의 질투로 인하여 대사(大事)를 그르치게 되었으니 어찌 한스럽지 않으리오. 나는 이제 이 땅을 떠나려니와 봉곡의 자손은 대대로 호미질을 면치 못하리라. 동양의 도통신(道通神)을 거느리고 서양으로 건너갔느니라.” 그때부터 서양문명이 융성했다고 한다.

근대 천지공사는 증산(甑山) 강일순(姜一淳)에 의해 펼쳐졌다. 구한말 세계열강들이 한반도를 농락할 때, 들불처럼 일어난 것이 동학농민군이었다. 1860년 경주 출신 최제우가 창시한 동학은 호남에서 미륵신앙이 더해지면서 급진 양상을 띤다. 백성이 주인이고, 터전은 내가 지킨다는 대동정신은 본래 동학의 지도부와 궤를 달리하여 반봉건·반외세의 기치를 높이 세우는 농민혁명군으로 거듭나 독자적인 무력혁명을 감행했다.

한편 증산은 다른 해법을 제시했다. 모악산에서 내려다보이는 두승산 아래 정읍시 덕천면 신월리 일명 ‘손바라기 마을’에서 태어난 증산 강일순은 동학농민혁명이 일어날 때 김제에서 서당 훈장을 하면서 전봉준 등을 만나 동학농민군은 패망할 것이라 예견했다. 그의 예견대로 혁명은 엄청난 인명 피해를 남기고 실패했다(1894).

외세는 그 공백을 틈타 더욱 기승을 부렸고, 증산은 절망에 빠진 민중들에게 희망을 주기 위해 골몰했다. 그때 논산의 김일부를 만나 후천개벽사상의 원리를 배우고, 모악산의 대원사에서 수도 정진하여 도통한다. 증산의 눈에는 조선 왕조 몰락의 근본원인이 누적된 원결(怨結)의 과보(果報)로 보였을 것이다.
금산 저수지 위에 위치한 구릿골(동곡리)의 광제국(또는 만국의원)에서 병든 사람과 사회를 치유하려 9년간 제자들을 모아놓고 ‘천지공사(天地公事)’를 벌인다. 천지공사의 핵심은 해원(解寃), 즉 그동안 쌓여온 하늘 귀신과 땅 귀신과 사람 귀신 등 모든 신명의 원한을 풀어주는 것이었다.

증산은 고대 삼국으로부터 누적된 전쟁으로 인한 개인적, 집단적 원한과 신분 계급 왕조의 누적된 폐해가 불러온 과보의 악순환 고리를 끊어야 했다. 증산 나이 38세인 1909년에 세상을 떠나면서 마지막으로 신도들에게 “나는 금산사로 들어가니 나를 보고 싶거든 금산사로 와서 미륵불을 보라”고 하였다. 대원사에서 도통한 증산이 최후엔 금산사 미륵불을 말한 것이다. 증산이 금산사 미륵불을 지칭한 것은 외양을 친견하라는 것이 아니라, 분별없이 민중 속에 살아 숨 쉬는 불성(佛性)을 보라는 것이리라.

증산이 죽기 1년 전 정읍군 입암면 대흥리 차경석(車京石)의 집에서 천지 굿이라는 큰 굿판을 연 적이 있다. 지난 역사 속에서 억압되었던 모든 여성들의 근원적 해방을 상징하며 후천이 개벽이 되는 가히 혁명적인 의식의 굿이었다. 차경석은 동학농민혁명의 십대 접주 중의 한 사람이었고, 평민두령으로 이름을 떨쳤던 차치구의 아들이며, 훗날 보천교(普天敎)의 교주가 된다.

보천교도는 조선총독부의 집계로도 170만 명을 웃돌았고, 전해 내려오는 얘기로는 700만 명이 넘었다고 하니, 그때 인구를 생각한다면 적어도 두 사람 중 한 사람이 보천교 신자였던 셈이다. 실의에 찬 민중들에겐 큰 위안이 되었는데, 차경석(일명 차 천자)의 석연치 않은 죽음 이후 보천교는 일제에 의해 급격히 와해된다. 경복궁 근정전보다 훨씬 규모가 컸던 십일전 건물은 경매되어 서울의 조계사로 옮겨져 대웅전으로 겨우 남아있고, 신도들이 숟가락 하나씩을 모아 만들었다는 1만8000근짜리 종은 해체되고 말았다. 이후에도 모악산이 후천세계의 중심지라 하여 증산을 믿는 사람들이 집단 이주했고, 수많은 종단이 들어섰다.

모악에는 상극이 공존한다. 가장 대중적인 부처가 있는가 하면, 가장 은밀한 부처도 있다. 그래서 모악만이 감히 해원상생(解寃相生)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알게 모르게 호남은 ‘반역향(反逆響)’이란 멍에를 썼다. 미륵의 땅이자 반역의 땅 모악산. 상극의 평가가 엇갈리는 모악산의 진면목은 어떤 것일까.

◇ 태조왕건 ‘훈요십조’ 호남차별 명문화

후백제의 견훤과 마지막까지 사투를 벌여 승리한 태조 왕건은 왕권조차 평등한 미륵신앙을 두려워했을까. 호남 차별을 명문화한 ‘훈요십조(訓要十條)’를 남겼다. 하지만 태조 이성계가 조선을 개국할 때 지역차별을 명문화한 훈시는 없었다. 그러나 조선의 광주사태라 할 수 있는 기축옥사(己丑獄事)가 벌어지자 정여립의 출생지인 해발 300m 제비산은 ‘역모의 땅’이라고 하여 땅을 파헤쳐 숯불로 혈맥을 끊고, 그 근처엔 집조차 들어서지 못하게 했다. ‘연려실기술’엔 정여립을 지금의 사탄(악마)에 해당하는 ‘악장군(惡將軍)’이라 기록하여 극렬히 폄하하고 있다.

이익의 ‘성호사설(星湖僿說)’에 호남은 산발사하(散髮駛河)의 풍토라는 기록이 남아있다. 호남의 강들은 저마다 흩어져 흘러 호남 기질은 끈기가 없다는 뜻이다. 반면 영남의 물은 모두 낙동강으로 흘러 합심이 잘 된다고 했다. 이중환의 ‘택리지’도 ‘지금도 지역이 멀고 풍속이 더러워서 살 만한 곳이 못 된다’고 심각한 지역적 편견을 노골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풍수지리를 논하려면 차별 없는 자연의 눈을 가져야하고, 적어도 중용(中庸)의 미덕쯤은 잃지 말아야한다. 큰 눈으로 본다면, 호남 강물이 서해로 흩어져 나가든 영남 강물이 한 곳으로 모이든 결국 모든 강물은 머지않아 하나의 바다로 모이게 되어있다. 산이 높으면 높은 대로 낮으면 낮은 대로 전체가 어울려 산하가 되는 것처럼, 평등 속에 차별이 있고 차별 속에 평등이 있다.

나그네가 본 평지돌출 모악산은 어머니의 풍성한 젖가슴 형국이다. 어머니의 젖을 빨며 꿈꾸는 아이처럼, 모악은 이상세계를 꿈꾸는 걸출한 인물들을 길러냈고 수많은 선각자들에게 영감을 불어넣어 왔다.
나그네의 지친 발걸음은 전주의 한정식 집으로 향했다. 지아비처럼 반기는 주인장의 환대 속에 상다리가 부러지도록 한 상이 차려져 나왔다. 동행한 지인들 그 누구도 전주가 맛의 본존임에 토를 다는 사람이 없었다.

모악산이 품고 있는 전주는 명실 공히 예향의 고장이다. 전주대사습놀이를 비롯해 하나같이 문화의 근간이 되는 빛, 소리, 음악, 글, 종이, 풍악, 맛에서 최상을 아우르고 있다. 이런 문화예술의 ‘끼’는 솟아나는 샘물처럼 절대로 한 곳에 머무를 수 없다. 활짝 핀 꽃의 향기처럼 주변에 널리 널리 문화의 젖줄을 공급한다. 그래서 미륵의 꿈, 모악의 꿈은 문화의 꽃으로 찬란하게 피어서 한 시도 진 적이 없다. 이것이 미륵의 이상향일지도 모른다.

모악산은 내게 아버지의 산이자 어머니의 산이다. 금번 경찰종합학교 교재 ‘살아있는 한국 경찰의 혼’의 주인공으로 선정된 선친 차일혁 총경은 모악산 자락에서 태어났고, 묘소도 그곳에 있다. 나그네 또한 전주 출생이고, 젊은 시절 만행을 하면서 한동안 대원사(大願寺)에 머문 적이 있다.

<[서울=뉴시스】 모악산 대원사. 뒤로 모악산 성상이 보인다>


※이 기사는 뉴시스 발행 시사주간지 뉴시스아이즈 제118호(2월16일자)에 실린 것입니다.


기사 출처 : 뉴시스아이즈 (2009-02-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