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1.03.14 '논개' 시인 변영로 타계
‘거룩한 분노는/종교보다도 깊고/불붙는 정열은/사랑보다도 강하다/아! 강낭콩 꽃보다도 더 푸른 그 물결 위에/양귀비꽃보다도 더 붉은/그 마음 흘러라.’(‘논개’ 중)
‘논개’의 시인 수주 변영로(樹州 卞榮魯)가 1961년 3월 14일 세상을 떠났다. 향년 64세였다.
수주(樹州·나무고을)는 경기 부천의 옛 이름이다. 부천시 고강본동에는 변(卞)씨 문중 소유의 산이 있으며 이곳에 변영로와 형제들, 부모와 조부모의 묘가 있다. 변영로는 조상이 500여 년 살아 온 고향의 이름을 아호로 삼았다.
변영로는 서울 재동과 계동의 보통학교를 거쳐 중앙학교에 들어갔지만 체조 교사에게 대든 일로 학교를 그만뒀다. 그렇지만 어학에 재능이 남달라서 1915년 조선중앙기독청년회학교 영어반 3년 과정을 6개월 만에 마치고 부설학원에서 영어를 가르쳤다. 1918년에는 자신이 졸업하지 못한 모교의 영어교사로 일했다. 이 무렵 영시 ‘코스모스’를 발표했다. ‘폐허’ 동인으로 문단에서 본격적인 활동을 하기 한참 전이었지만(그는 1920년대 이후 활발하게 시를 썼다) 변영로는 이때부터 ‘천재시인’이라는 얘기를 들었다. 1919년 3·1운동 때 ‘독립선언문’을 영문으로 번역해 해외로 발송하기도 했다.
‘논개’는 1924년 발간된 시집 ‘조선의 마음’에 수록됐다. 강렬한 ‘논개’뿐만 아니라 시집에 실린 작품 대부분이 민족적 색채가 짙다. 이 시집은 출간 직후 일제에 의해 판매 금지 및 압수령이 내려졌다. 변영로의 시는 올곧고 저항적인 시편들로 알려졌지만 우리말의 아름다움을 잘 나타낸 작품이기도 하다. ‘생시에 못 뵈올 임을’ 등이 그렇다. ‘생시에 못 뵈올 임을/꿈에나 뵐까 하여/꿈 가는 푸른 고개 넘기는 넘었으나/꿈조차 흔들리우고 흔들리어/그립던 그대 가까울 듯 멀어라.’
동아일보가 발간하던 여성지 ‘신가정’의 편집장으로 근무하던 변영로는 1936년 손기정 선수 일장기 말소사건에 연루됐다. ‘신가정’ 표지에 손 선수의 다리만 게재하고 ‘조선의 건각’이라고 제목을 붙여 총독부의 비위를 건드린 것이다. 총독부의 압력으로 회사를 떠났지만 마음을 굽히지 않았다. 일제의 압박이 극에 달했던 1940년대에는 향리에 칩거했다.
그의 형제 모두 두드러졌다. 큰형 영만은 국학자로 약관에 법관에 오를 만큼 뛰어났다. 영문학자인 둘째형 영태는 국무총리를 지냈다. 변영로도 광복 후 성균관대 영문과 교수, 대한공론사 이사장 등을 지냈다.
변영로[ 卞榮魯 ]
1897. 5. 9 서울~1961. 3. 14 서울.
시인.
1920년대 감상적이며 병적인 허무주의에서 벗어나 시를 언어예술로 자각하고 기교에 중점을 두었다. 호는 수주(樹州). 아버지 정상(鼎相)과 어머니 강재경(姜在卿) 사이에서 3남으로 태어났다. 서울 재동보통학교를 거쳐 1910년 중앙학교에 입학했으나 1912년 졸업을 앞두고 퇴학당했다. 1915년 조선중앙기독교청년회학교 영어반을 6개월 만에 수료하고 1918년 모교인 중앙학교 영어교사가 되었으며, 이때 명예졸업생으로 졸업했다.
1919년 3·1운동 때는 독립선언서를 영문으로 번역해 해외에 발송하는 일을 맡았고, 1920년에는 〈폐허〉의 동인으로 문단활동을 시작했다. 1923년 이화여자전문학교 강사로 영문학과 조선문학을 강의했으며, 1931년 미국 캘리포니아 주 산호세대학에 입학해 2년 동안 공부했다. 1933년 귀국해 동아일보사 기자, 〈신가정〉 주간, 〈신동아〉 편집장 등을 역임했으며, 문우회관(文友會館)을 운영하기도 했다. 1946년 성균관대학교 영문학과 교수로 취임했다가 1955년 〈불감(不感)과 부동심(不動心)〉이 '선성모욕'(先聖侮辱)이라는 필화사건으로 사직했다. 1954년 국제 펜클럽 한국본부 초대 위원장을 역임했으며, 이듬해 오스트리아 빈에서 열린 국제 펜클럽 대회 한국대표로 참가했다.
1921년 〈신천지〉에 〈소곡 5수〉를 발표한 데 이어 〈신생활〉·〈동명〉 등에 여러 작품을 발표하면서 본격적인 창작활동을 시작했다. 1924년에 펴낸 시집 〈조선의 마음〉으로 한국문단에서 주목받는 시인으로 부상했다. 〈페허〉의 동인이면서도 〈백조〉류의 낭만성이 짙은 작품을 발표한 그는 비교적 건강한 서정성과 민족정신을 드러내고 있다. 우선 그의 아름다운 서정성은 초기의 자유시들과 후기의 시조들에서 볼 수 있다. '나즉하고 그윽하게 부르는 소래잇서/나아가 보니, 아, 나아가 보니'로 시작되는 〈봄비〉(신생활, 1922. 3)와 '생시에 못뵈올님을 에나 뵐가하여/가는 푸른고개 넘기는 넘엇스나'로 시작되는 〈생시에 못뵈올 님〉(폐허 이후, 1924. 1) 등 초기시에 나타나는 연이나 행의 반복에 따른 표현의 기교와 음수율로 인한 음악적 요소의 강화는 후기에 와서 시조 〈고흔산길〉(시문학, 1930. 5)·〈곤충 9제〉(문장, 1941. 4)를 통해 더욱 정제되고 세련된 모습으로 나타난다. 특히 서정적 가락과 민족애가 함께 어우러진 〈논개〉에서는 상징과 은유, 그리고 '아, 강낭콩꽃보다도 더 푸른/그 물결 위에/양귀비꽃보다도 더 붉은/그 마음 흘러라'라는 붉음과 푸름의 회화적인 색채대비를 통해 민족에 대한 일편단심을 노래하고 있다. 논개에 대한 찬양은 자신의 민족애를 반영한 것으로 민족혼의 되새김을 통해 좌절을 극복하려는 의지를 보여준다. 한편 〈논개〉와 주제면에서 일치하고 있는 〈조선의 마음〉에서는 당대의 현실 속에서 "조선의 마음을 어대가 차즐가?"라는 화자의 간절한 마음을 직설적으로 표현해 민족적 울분을 대변하고 있다.
1930년을 기점으로 해 전통문화의 계승과 고전문학부흥운동을 시조창작으로 구체화했다. 그러나 1940년대에는 작품활동이 저조했으며, 1950년대에는 주로 수필을 많이 썼다. 수필집 〈명정 40년〉(1953)은 그의 솔직한 심정과 풍자·해학·기지를 엿볼 수 있는 작품집이다. 그밖에 평론으로 〈메테를링크와 예이츠의 신비사상〉(폐허, 1921. 1)·〈종교의 오의(奧義)〉(신천지, 1921. 7) 등을 발표했고, 시집으로 〈수주시문선 樹州詩文選〉(1959)·〈차라리 달 없는 밤이 드면〉(1983) 등을 발표했으며, 수필집으로 〈수주수상록〉(1954)·〈명정반세기〉(1969) 등이 있다. 1948년 제1회 서울특별시 문화상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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