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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게도 이롭고 타인에게도 이롭게 사는 법

서까래 2010. 5. 13. 18:55

 
 
내게도 이롭고 타인에게도 이롭게 산다는 것이 말처럼 쉬울까? 설사 사적인 관계라도 누군가에게 문자를 보내는 일조차 그 사람이 휴대전화 버튼을 눌러 메시지를 확인하기까지의 시간만큼 상대에게 피해를 입히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런데 내 정신 건강에도 좋고 상대방에게 해를 끼치지도 않으며 사는 방법이 있기는 한 걸까?
 

문은희 소장은요…

<눈치 보는 한국 여자>의 저자이자, 한국알트루사(cafe.daum.net/altrusa, 정신건강운동 사회단체)의 여성 상담 심리학자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한국인은 모두 스몰 sm, 소심증(s-mind)에 걸렸다. 자신의 시선과 조금만 어긋나도 “4차원이니, 5차원이니, 사회 부적응자니” 하는 말들을 붙인다. 자신의 이름이 누군가에게 불리기 전에는 명함조차 내밀지 못할 정도로 당당하지도 않다. 모든 기준은 남에게 있고 정작 ‘내가 정한 기준’은 없다. 그 이유를 상담심리학자 문은희 소장은 이렇게 말한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2010년인 지금도 여전히 우리 머리에 고인 유교적 가치관 때문 아닐까요?”
40대를 ‘불혹’, 50대를 하늘의 명을 알게 된다는 ‘지천명’이라 일컫듯 ‘모든 사람은 같다’는 전제로 우리의 뇌에는 은연중에 한 가지 모델만 존재한다. 그래서 개인으로 존재하지 않고 개인 속에 다른 사람 여럿이 존재하는 것이다. 문은희 소장은 이를 일컬어 “몸은 하나인데 머리는 수없이 많이 달린 괴물”이라는 표현을 썼다.
어떤 엄마도 아이가 학교에서 공부 이외의 다른 것으로 ‘튀는’ 존재가 되기를 원치 않을 거다. 일본의 학부모들은 “학교에 가서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주지 마라”라는 말을 아침마다 한단다. 이렇듯 어릴 적부터 다른 사람들의 시선을 언제나 먼저 중요시하도록 훈련을 받았으니 개인은 뒷전이고, ‘개인의 취향’ 역시 어불성설일 수밖에 없다. ‘개인의 취향’이 ‘모두의 취향’으로 바뀔 일 따위는 결코 일어나지 않는 것이다.
“한국 사람들은 만약 자신이 꽃병을 깨뜨렸다면 ‘미안한 마음, 보상해줘야 할 필요’를 먼저 느끼겠지요? 그런데 서양 사람들은 꽃병을 깨뜨렸을 때 ‘아, 내가 다치지 않아서 다행이다’라는 생각부터 든다고 해요. 이렇게 ‘나’를 먼저 존중하니까 ‘다른 사람’을 존중하는 마음도 자연스레 생기고 예의를 갖추게 되는 거죠. 좀 더 부피를 줄여 ‘여자’ 입장에서 볼까요? ‘여자의 적은 여자’라는 말을 누가 지어냈을지 생각해본 적 있나요? 남자들이 여자들 사이를 시기해 만든 말은 아닐까 하고 생각해본 적 있어요?”
여자들의 세계는 좁고 길다. 그녀들 사이에서는 ‘독한 년’만 살아남는다. 그리고 그 ‘독한 년’들은 남들의 욕을 한 몸에 받을 때 비로소 남자들과 대결할 위치에 놓이게 된다. 이렇게 자신을 낮추고 또 낮추다 보니 자녀들에게 자기가 받은 교육을 시키는 악순환이 계속될 수밖에 없다. “넌 아들이니까, 혹은 넌 딸이니까 이렇게 행동해야 해”라고 성(性)벽을 쌓아 올리는 것이다.
“저희 집은 어머니 아버지 그 이전부터 남녀 구분을 안 하고 자랐어요. 어릴 때부터 내 의견을 이야기할 때 제약을 받지도 않았어요. 일례로 우리 외할아버지는 동네 아이들에게 한문을 가르치시다가도 비가 오면 버선발로 뛰쳐나가 손수 빨래를 걷곤 하셨어요. 오빠 셋은 물론 아버지와의 대화도 매끄러웠고, 그런 기준으로 남자친구도 대했어요. 그래서 굳이 우리나라의 ‘유교병’이 없어도 ‘우리나라 사람들’도 서로에 대한 존중이 가능하다는 것을 잘 알아요. 다른 사람의 인정과 시선을 받아야 안심이 된다면 그건 고쳐야 할 생활 장애죠.”
 
 

“하루는 남편과 지하철을 탔어요. 경로석에 앉았는데 내 옆의 한 남자에게서 독한 담배 냄새가 나는 거예요. 한 정거장, 한 정거장 지날수록 담배 냄새 때문에 머리가 윙윙거리고 멀미가 나서 토할 정도였죠. 지하철에서 내려 남편에게 ‘옆의 남자 때문에 멀미가 나서 죽을 지경이었어’라고 말하자 그이가 이러더라고요. ‘그럼 자리를 옮기지 그랬어’라고요.”
문은희 소장이 그렇게 멀미를 하면서도 자리를 옮기지 못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내리는 것이면 몰라도 폴짝 자리를 옮겨 앉으면 그 사람이 얼마나 무안해할까?’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이렇듯 우리나라 사람들은 ‘내 탓’도 잘하지만 ‘남 탓’도 지레 잘한다.
그녀가 손꼽은 또 하나는, 우리나라 사람들이 잘하는 말 중 1위가 바로 “아무거나”란다. 뭐 먹고 싶으냐고, 어떤 선물을 받고 싶으냐고 물어도 “아무거나”라고 대답한다는 것. 그러나 이 말은 은연중 나와 내 환경문제를 주장할 기회와 권리를 스스로 내팽개치는 것과도 같다. 어떤 피해를 받았다고 느끼면 항의해야 하는데도 내 생각을 주장하지 않는다는 것은 그만큼 스스로에게 무책임한 일이기도 하다. 모든 문제의 근원은 주변에 없다. 자신의 주변 환경을 꼼꼼히 살피지 않고 스스로의 컨디션을 무시한 ‘나’에게 모든 문제의 실마리가 있다. 문은희 소장은 지금부터라도 “자신의 느낌에 귀를 기울이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한다.
“아휴, 결혼은 진즉에 포기했죠. 서른 중반인데 한참 늦었죠, 뭐.” “내가 뭐 마누라 보고 사나, 애 때문에 이혼 못하고 사는 거지.” 이런 식으로 자신의 처지를 비관하거나 자신의 처지를 아무렇게나 여기는 말들을 툭툭 내뱉는 이들과 상담을 하다 보면, 어릴 적 부모 밑에서 할 말을 못하고 산 사람도 있고, 어머니 아버지의 강박관념에서 벗어나지 못한 과거의 모습들이 지문처럼 묻어나온다고 한다. 그래서 현실 인식은 무 자르듯 단편적인 사건으로만 파악해선 안 된다는 것. 모든 문제의 근원은 자신의 주변에 있는 게 아니라 ‘자신’이 알지 못하는 내면과 맞닿아 있을 때가 많고, 그것을 빨리 깨닫는 사람이 어른 중에서도 모범생 표창장을 받을 수 있다.
우리가 체크해야 할 것은, 외모 가꾸는 데는 많은 시간과 돈을 들이면서 정작 자기 내면을 건강하게 하려는 노력은 게을리 한다는 사실이다. 외모 가꾸는 데 돈을 들이고 유행에 맞춰 옷을 입어야 하는 것처럼 우리 마음도 때에 따라 정기검진을 받아야만 한다.

 
 
어느 날 문은희 소장의 딸이, “엄마는 나를 서른에 낳아서 길렀지만 나는 내 나이만큼 엄마를 평생 알거든?”이라는 기똥찬 농담을 하더란다. 그때 문득 든 생각이 ‘내가 낳은 자식이니까 내가 제일 잘 알아’라는 자신의 생각이 어쩌면 오만이었을 수도 있다는 깨달음이었다고. 자식이 어릴 때는 엄마의 영향력이 아이의 가치관을 좌지우지할 수 있어도, 아이가 사춘기에만 들어서도 컨트롤하기 힘들다고 느껴지는 것은, ‘아이가 사춘기라 부모에게 대항해서’가 아니라 아이와 상호작용하는 관계를 만들어야 한다는 것을 부모가 미처 생각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레스토랑에서 심심찮게 들리는 ‘레어’니, ‘미디엄 레어’니 하는 말이 집 안에서 오갈 가능성은 0%다. ‘내가 니들 식성 다 알아, 달걀은 무조건 반숙에 밥은…’ 식으로 당연히 내 아이의 모든 것을 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나와 내 아이를 일대일의 개체로 보지 않고 늘 내 생각의 범주에서 벗어날 리 없는 아이로만 생각한다. 엄마가 아이를 파악하는 눈을 높일 여유가 없는데 내 아이가 어떤 아이인지 알아갈 시간적 여유가 있을 리 없다.
직장에 사표를 내는 가장 큰 이유도 서로를 이해할 여유가 없는 ‘피상적 인간관계’이기 때문이다. 개개인의 느낌이 생생이 살아 있는데 그것을 자꾸 죽은 것으로 여기고, 단지 ‘스트레스’로만 여기기 때문에 서로의 마음을 소중히 여기지 않게 된다는 것. 눈 한번 찡긋, 코 한번 찡긋해서 서로서로 마음을 알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내가 아는 사람은 내가 제일 잘 안다는 생각, 한 번 보인 실수를 놓고 그 사람을 ‘어떤 사람’이라고 단정짓는 서두름이 자신과 타인을 둘러싼 모든 관계에 빗금을 그어놓는다. 그러나 결국 갇히고 옥죄이는 것은 상대가 아닌 자신이다.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일(=이성)과 사랑(=느낌)이다. 인간의 가장 큰 욕구인 성취욕을 자극하기 때문이다. 그런 ‘일터’에서 ‘힘듦’을 느끼고 사표를 던지는 것은 오직 ‘일’만 중요시할 뿐 ‘사랑’은 쏙 빼놓으려는 사람이 많기 때문이다. 일터에도 분명 성취 영역과 사랑을 나누고 도리를 지켜야 하는 영역이 있지만, 그것이 분리되기도 하고, 각각의 가치를 중시해야 하는 입장이 천차만별이기 때문이다. 남의 입장을 이해하는 ‘사랑’이 부담스러울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나중에 내게 돌아올 ‘심리적 보상’을 미리 염두에 둘 수 있다면 일도, 사랑도 조금은 수월해지지 않을까?
이성과 느낌, 감성을 챙기는 일이 ‘여성이 가진 그들만의 부드러운 파워’냐는 질문에 문은희 소장은 고개를 젓는다.
“부드러움은 여성만의 전유물이 아니라고 생각해요. 부드러움의 속성이 다른 이를 보살피고 이해하고자 하는 마음인 만큼 남자들에게도 부드러움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어요. 여자들도 갖춰야 하지만 남편들도 갖춰야 하죠. 남편들은 늘 ‘일’이라는 반의 영역만 살고 있어 아내들이 바가지를 긁는 것 아닐까요?(웃음) 남자들도 ‘일’과 ‘사랑’ 모두 챙겨야 할 것 같아요.”
‘마음 건강한 어른들이 만드는 착한 사회’, 그것이 우리가 맨 처음 물었던 ‘내게도 이롭고 타인에게도 이롭게 사는 법’ 아니겠냐며 문은희 소장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기사제공 리빙센스ㅣ사진 김경숙ㅣ에디터 안소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