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황사(美黃寺)
열이레 달이 힘겹게 산기슭을 오르고 있었습니다
사랑도 나를 가득하게 하지 못하여
고통과 결핍으로 충만하던 때
나는 쫓기듯 땅끝 작은 절에 짐을 부렸습니다
세심당 마루 끝 방문을 열면
그 안에 가득하던 나무기둥 냄새
창호지 냄새, 다 타버린 향 냄새
흙벽에 기댄 몸을 살붙이처럼
아랫배 깊숙이 그 냄새들을 보듬었습니다
열이레 달이 힘겹게 산기슭을 오르고 있었고
잃어버린 사람들을 그리며 나는
아물지 못한 상실감으로 한 시절을
오래, 휘청였습니다
……색즉시고옹공즉시새액수사앙행식역부우여시이사리자아아시이제법공상불생불며얼……
불생불멸……불생불멸……불생불멸……
꽃살문 너머
반야심경이 물결처럼 출렁이면
나는 언제나 이 대목에서 목이 메곤 하였는데
그리운 이의 한 생애가
잠시 내 손등에 앉았다가 포르르,
새처럼 날아간 거라고
땅끝 바다 시린 파도가 잠시
가슴을 철썩이다 가버린 거라고……
스님의 목소리는 어쩐지
발밑에 바스라지는 낙엽처럼 자꾸만
자꾸만 서걱이는 것이었는데
차마 다 터뜨리지 못한 울음처럼
늙은 달이 온몸을 밀어올리고 있었습니다
그의 필생의 호흡이 빛이 되어
대웅전 주춧돌이 환해지는 밤
오리, 다람쥐가 돌 속에서 합장하고
게와 물고기가 땅끝 파도를 부르는
생의 한때가 잠시 슬픈 듯 즐거웠습니다
열반을 기다리는 달이여
그의 필생의 울음이 빛이 되어
미황사 빛과 어둠의 경계에서 홀로 충만했습니다 "
- 김태정 시인(1963~2011)
생전 시집 한 권을 남겨놓고 2011년 생을 마감한 김태정은 주목받지 못한 시인이었다.
글을 써서 돈을 벌고 싶은 마음도,
출세하고 싶은 욕망도 없었다.
무려 13년 동안 쓴 시를 엮어 겨우 시집 한 권을 남긴 그였다.
그는 여전히 시인들 마음속에 살아 있다.
그를 아는 시인들의 전언을 통해 우린 김태정을 다시 살펴보게 된다.
지리산에 사는 이원규 시인은 생전 그를 일컬어
"이 땅에 태어나 가장 죄를 적게 짓고 사는 시인이 있다면
달마산에 깃들여 사는 김태정 시인"이라고 말한 적이 있다.
또 시인의 사후, 그를 알고 지냈던 시인 김사인은 `김태정'이란 시 한 편으로 그를 기렸다.
동료 시인의 눈에 비친 김태정의 마흔 여덟 짧은 생이 비로소 손에 잡힐 듯 생생히 전해온다.
"슬픔 너머로 다시 쓸쓸한
솔직히 말해 미인은 아닌
한없이 처량한 그림자만 덮어쓰고 사람 드문 뒷길로만 피하듯 다니던
소설공부 다니는 구로동 노동자 공아무개 젖먹이를 도맡아 봐주던
순한 서울 여자 서울 가난뱅이
나지막한 언덕 강아지풀 꽃다지의 순한 풀밭
응, 나도 남자하고 자봤어, 하더라는
그 말 너무 선선하고 환해서
자는 게 뭔지 알고나 하는 소린지 되려 못 미덥던
눈길 피하며 모자란 사람처럼 웃기나 잘하던
살림솜씨도 음식솜씨도 별로 없던
태정 태정 슬픈 태정
망초꽃처럼 말갛던 태정 "
-김사인의 시 <김태정> 中
나를 미황사로 이끈 이는 김태정 시인이었다.
그것이 알길 없는 시집 한 권의 마력이겠다.
그곳에서 기억 속 연인을 그리듯 나는 그 시인을 생각하고 있었다.
전날 늦은 밤까지 그녀의 시를 반복해 읽었고,
시집의 말미에 담긴 동료 시인의 비평도 꼼꼼히 보았다.
그러나, 나는 김태정에 대해 뭐라 말할 수 없었다.
내가 그날 미황사에서 찾으려 했지만 결국 찾지 못한 것은
그가 사랑하고 회피하려 하지 않았던 `자발적 가난'과 `무욕' 의 정체 아니었을까.
...하략
이상 “김태정 시인의 시 모음”이라는 글에서 발췌했는데 원문 출처는 모르겠음
3년여 만에 그 형님을 만나 뵈었다.
통화할 때마다 “올해는 한번 만나야지요.”하면서도
몇 년을 흘려보냈다.
얼마 전 통화할 때 해남 땅 끝에 있는 미황사를 가봐야 한다며
금년 중에 얼굴도 볼 겸 광주에 한번 내려 오시겠다하셨다.
하지만 마음뿐이고 칠순 노구를 이끌고 무얼 그리 바삐 사시는지
내려오신다는 말씀이 영 미덥지가 않아
내려올 때 내려오시더라도 조카 결혼식에 참석차 상경한 김에
한번 만나 뵙기로 약속을 하였다.
저와 이 형님과의 인연도 참 특별하다.
사람 사귀는 걸 별로 좋아하지도 않는 내가
금연이라는 매개체로 온라인상에서
형님을 만나 어언 15년 지기가 되었으니
인연의 끈이 튼튼한 것도 같고, 세월이 참 빠르기도 하다.
만나서 자리를 잡자마자 미황사에는 어떤 스님을 뵈러 내려오시느냐고 여쭸더니
대뜸 하시는 말씀이 “내가 뭐하러 중*을 만나러 가겠어요?”
“내가 사랑하는 연인을 만나러가지요”
시집 한권을 사서 읽고 나서 40대에 요절한 한 여류시인을 연모하게 되었답니다.
서울에서 태어나 서울토박이로 살다가 미황사에 몇 년동안 머물며 총무보살로 지내다가 암으로 급작스레 세상을 떠났다는 김태정 시인,
스님들께서 정성스레 다비식을 치르고 남은 유해를
가장 빨리 피는 동백나무 아래 뿌렸다합니다.
박학다식하신 데다 칠순을 넘기신 연세에도 배움에 대한 열정이 남다르셔서
내가 가장 존경하고 스승님처럼 모시는 형님께서
그토록 연모하게 된 시인이 어떤 분일지 궁금하여
인터넷을 검색해 보았더니 김태정 시인을 연모하는 분들이 한 두분이 아닌 듯 합니다.
그 것도 대부분의 사람들이 사후에 그 분의 시를 접하고서 말입니다.
저는 아직 시를 이해하지 못하는 수준이지만
짧은 머리에도 자주 읽다보면 저도 그분을 연모하게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잠깐 동안 주마간산 격으로 그 분에 대해 훑어보았지만
그가 한 달에 오만원도 안 쓰고 살았을 거라는 말처럼
빈한하지만 맑은 영혼으로 학처럼 살다 가셨을
시인의 일상이 머리 속에 그려지는 듯합니다.
어쩌면 김태정 시인 덕분에 미황사를 한번이라도 더 찾게 될 것 같습니다.
삼가 김태정 시인님의 명복을 빌고,
저승에서라도 많은 사람들이 그분의 시를 사랑하고
연모하고 있다는 것을 아시고 평안하셨으면 좋겠습니다.
너는 너대로 나는 나대로 각자의 삶이 있습니다.
타인들의 삶에 경외감을 느끼고 동경할 수도 있지만
그분들과 같은 삶을 살 수도 없고,
굳이 그렇게 살 필요도 없을 겁니다.
어쩌면 평범하고 보편적인 게 가장 바람직한 건지도 모릅니다.
내 인생은 나의 것.
나름대로의 삶을 살아가야하지 않을까요.
오늘도 따사로운 봄날 같은 날씨가 이어집니다.
오늘 하루도 평안하시고 안녕하시길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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