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이 깊어가는 일요일 오후 가을햇살이 따사롭다.
저물어가는 가을이 아쉬운 낙엽은 떨어져 산야에 널려 있고,
차가운 대지와 우리의 마음까지도 포근하게 덮고 있다.
소설가 이효석님은 “낙엽을 태우면서”라는 수필에서
"낙엽 타는 냄새같이 좋은 것이 있을까. 갓 볶아 낸 커피의 냄새가 난다.
잘 익은 개암 냄새가 난다.
갈퀴를 손에 들고는 어느 때 따지든지 연기 속에 우뚝 서서 타서 흩어지는
낙엽의 산더미를 바라보며 향기로운 냄새를 맡고 있노라면 별안간 맹렬한
생활의 의욕을 느끼게 된다.“고 설파하셨지만,
낙엽 쌓인 새벽 산길을 걷다 보면, 뭐라 형언할 수 없는 그윽하면서도 강렬한
낙엽의 향기가 확하고 코앞으로 다가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아마도 낙엽의 향기도 삶의 의욕을 북돋아 주는 활력소일 것임에 틀림이 없을 것이다.
오늘이 결혼 23주년이다.
어쩌면 이제 나도, 아니 우리도 가을의 길목에 들어선 게 아닌가 싶다.
성격상 기념일 같은 것에 큰 의미를 부여하지도 않지만,
결혼기념일을 특별히 챙긴 기억은 별로 없다.
사실 이번에도 결혼기념일을 전혀 생각하지 못하고 지나칠 뻔 했다.
물론 그 사람이 몰랐을 리가 없으니 늧게 라도 알긴 했겠지만...
며칠 전 서울에 있는 딸들이 결혼기념으로 족탕기를 사서 보내왔다.
용돈도 변변하게 챙겨주지 못하는 터에 알바하여 모은 돈으로 선물까지 사서
보내준 딸들에 대한 대견함과 미안함에 눈시울이 붉어진다.
얼마 전 집사람이 상경하여 스치로폼 상자로 족욕을 하니 보온도 되고 좋더라는
말을 했더니, 딸들이 발암물질이 나오는 걸로 족욕을 한다고 타박을 하더라니 만.
어제 가까운 화순 만연산에 가벼운 산행을 하고 일어난 일요일 아침,
중학교 다니는 아들 녀석은 뜬금없이 교회를 간단다.
요즘 일부 교회들은 교회 나오는 애들에게 용돈까지 준다고 한다.
집사람도 잠깐 밖에 나가고, 혼자 뒹굴며, 오늘은 무엇을 할까 생각하는데,
집사람이 내일 저녁밥 대신, 아들 데리고 밖에 나가 점심이나 하잖다.
안 그래도 간단히 산책이나 하려던 차에 반대할 이유가 없다.
메뉴는 소박하게 아들이 좋아하는 돼지갈비로 정하고,
아들이 돌아오기를 기다리다 점심시간을 넘겨서 담양 수북으로 향한다.
병풍산과 삼인산이 눈앞에 펼쳐진 곳에서 즐기는 소주 한 병을 곁들여
식사를 하고 청소년수련원 아래쪽에 있는 대방저수지로 향한다.
저수지 상류에서 삼인산과 병풍산 만남재로 가는 등산로가 있지만,
오늘은 산행이라기 보다는 봄에 왔었던 그 길을 가볍게 산책이나 하며
오수를 달래고자 함이다.
산길로 접어드니 산책로를 덮고 있는 갈색 단풍이 눈길을 사로 잡는다.
어제도 낙엽을 실컷 밟고 다녔건만 감탄사가 절로 나온다.
“와! 여기 진짜로 좋다” 그랬더니
집사람이 “당신이 어디 안 좋아 하는 곳이 있어?”그런다.
마치 자기는 안 그러는 것처럼...
사실 정도 차이가 있을 뿐, 산치고 안 좋은 곳이 어디 있던가?
그런데 산책을 시작하자마자 막둥이는 바로 싫증을 낸다.
1년 새에 키는 훌쩍 자라 제 엄마보다 커서 성년의 틀을 갖춰가고 있으나,
아직은 철부지에 불과한 아들은 얼른 집에 가서 게임을 즐기고 싶을 것이다.
아들의 투정에 집사람은 일찌감치 아들과 둘이서 길섶에 자리를 잡고 앉는다.
기다리고 있을 테니 혼자 다녀오란다.
병풍산을 마주보고, 왼쪽에 삼인산을 끼고
낙엽이 쌓여 호젓한 가을 길을 홀로 걷는다.
50이 넘도록 살아오면서 봄부터 가을까지 금년처럼 자연을 많이 접한 적이 없는 것 같다.
그리고 우리가 함께한 23년이란 세월 속에서도....
젊은 시절에도 시간만 나면 애들 데리고 어디로건 많이도 돌아다녔다.
그러다가 큰 애가 고등학교에 들어가면서부터,
둘째가 고등학교 마칠 때까지 4년간은 주말이 자유롭지가 못했다.
토요일 오후 기숙사에서 데리고 나왔다가 일요일 오후에 바래다주는
생활이 이어지다 보니 휴일을 마음대로 활용하기가 어려웠었다.
그리고 나서는 업무에 쫓겨 한참 동안을 휴일도 잊은 채 헤매고 살았다.
아무튼 자연을 자주 접할 수 있다는 건 무척이나 행복한 일이다.
23년 전인, 1987년 11월 22일 갓 서른이었으니 그땐 젊었고, 자신감에 넘쳐 있었다.
욕심 안 부리고 살아도 그저 남들 사는 만큼이야 못 사랴 싶었는데,
인력만으로는 안 되는 세상사, 세상살이가 그리 녹록치만은 않았다.
어려움을 묵묵히 이겨내며 사랑으로 애들을 키워온 아내가 그저
고맙고 사랑스러울 뿐이다.
때로는 그냥 스러질 듯 한 나의 마음까지도 다독여 주면서 살아온 짧지 않은 세월이었고,
앞으로도 오래도록 서로 두 손 마주잡고 힘겨움도 행복도 함께 누리며 이겨나갈 것이다.
주마등처럼 스쳐지나가는 지난 세월 속에서 어려움도 많았었지만,
그런 가운데서도 우리 가족이 행복하게 살아온 것은
집사람의 헌신적인 사랑에 기인한다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부모의 뒷받침이 부족함에도 불평 없이 꿋꿋하게 생활하는 애들이 눈물겹도록 고맙다.
첫째, 둘째는 머잖아 사회로 뛰어들어 독립을 하게 될 것이고,
나보다 훨씬 나은 삶은 아니더라도, 나보다야 더 안락한 삶은 영위할 수 있을 것이다.
많은 사랑을 받고 자란 애들이기에 누군가와 사랑을 주고 받으며,
아마도 무척 행복하게 살리라는 기대를 감출 수 없다.
아직은 철부지인 막내는 언제쯤 방향을 잡을 지 알 수는 없지만,
올해 말 경에는 변화하기를 조심스럽게 기대해 본다.
어려서는 눈만 뜨면 책을 보던 녀석이 언젠가 부터는 눈만 뜨면
게임 삼매경에 빠져 헤어날 줄을 모른다.
가정교육을 제대로 못 시켜서 버릇이 좀 없고, 게임중독에 빠진 게 문제지만,
당장은 게임에서만 벗어난다면 더 이상 바랄 것도 없겠다.
컴퓨터 게임중독과 담배중독 중 어느 것이 더 끊기 어려울까?
담배만큼은 아니더라도 게임을 끊는 것도 결코 쉽지는 않으리라.
스스로 느끼지 않는 한은.....,
그러나 그날이 얼마 남지 않았을 것임을 믿는다.
그리고 그 또한 꿈을 심어 주지 못한 못난 애비 탓임을 나는 잘 안다.
아들이여 스스로 꿈을 꾸거라!
그리고 너의 날개를 펴고 마음껏 비상하거라!
오늘은 낙엽이 쌓인 호젓한 산길을 걸으면서 마냥 즐겁고 행복할 뿐이다.
나는 아니 우리 인생도 이제 성하를 지나 가을로 접어들고 있다.
세월이 가면 언젠가는 낙엽처럼 떨어져 내릴 것이다.
그리고는 함께 바람에 날려 뒹굴다가 우리 아이들을 닮은 커다란 나무 밑에 누워
봄의 태동을 기다리는 나무들의 자양분이 되어 스러지는 낙엽처럼 그렇게 사라지겠지......
때가 되어 낙엽 됨은 순리일 진데 어찌 이를 섧다 하겠는가?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 요한복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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