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광야 //이육사
까마득한 날에
하늘이 처음 열리고
어데 닭 우는 소리 들렸으랴.
모든 산맥들이
바다를 연모해 휘달릴 때도
차마 이곳을 범하던 못 하였으리라.
끊임없는 광음을
부지런한 계절이 피어선 지고
큰 강물이 비로소 길을 열었다.
지금 눈 내리고
매화향기 홀로 아득하니
내 여기 가난한 노래의 씨를 뿌려라.
다시 천고의 뒤에
백마 타고 오는 초인이 있어
이 광야에서 목 놓아 부르게 하리라
....
오늘은 하늘이 열린 날,
시월이 열리고 하늘도 열렸다.
그런데 개천절에 이육사 시인의 "광야"라는 시가 퍼득 떠오름은
"하늘이 처음 열리고"라는 구절 때문이리라.
어디서 닭 우는 소리가 들리는 듯 하다.
천고의 세월이 흘렀으니 백마를 탄 초인이 나타나시려나?
이육사시인의 광야와 함께 희망을 꿈꾸는 하루되시길...
엄정행의 "선구자"
https://youtu.be/sO1RrJtvEic
신영옥의 "비목"
https://youtu.be/sO1RrJtvEic
-이육사
본관은 진성(眞城). 경상북도 안동 출신. 본명은 원록(源綠) 또는 원삼(源三). 원삼은 주로 가정에서만 불렀다고 한다. 개명은 활(活), 자는 태경(台卿). 아호 육사(陸史)는 대구형무소
수감번호 ‘이육사(二六四)’에서 취음한 것이다.
이육사(본명 이원록)는 1904년 음력 4월 4일 경상북도 안동에서 이퇴계의 14대손으로 태어났다. 이 시절 선비의 자녀들이 대개 그러했듯이 육사도 다섯 살 때 할아버지에게서 한문을 배우는 등 어린 시절에는 전통적인 한학을 공부했다. 그러다가 할아버지가 맡고 있던 보문의숙(寶文義塾)에 다니기 시작한 열두 살 이후(1905) 백학서원을 거쳐(19세) 일본에 건너가 일 년 남짓 머물렀던 스무 살(1923) 무렵까지는 한학과 함께 주로 새로운 학문을 익힌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1925년 그는 항일투쟁단체인 의열단에 가입하여 독립운동의 대열에 참여한다. 6.10만세사건이 일어난 1926년 북경에 갔다가 다음해 귀국한 그는 장진홍 의사가 일으킨 대구은행 폭파사건의 피의자로 붙들려 형님 및 동생과 함께 옥에 갇혔다가 장진홍 의사가 잡힘으로 석방되었지만 같은 해 10월 광주학생사건이 터지자 또 예비 검속되기도 한다. 1931년 북경으로 다시 건너간 육사는 이듬해 조선군관학교 국민정부군사위원회 간부훈련반에 들어가서 두 해 뒤에 조선군관학교 제 1기생으로 졸업한다.
그는 이 시절에 북경대학 사회학과에서 공부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으나 언제 대학을 졸업했는지 현재로서는 알 길이 없다. 1943년 일본 형사대에 붙잡혀 해방을 일 년 남짓 앞둔 1944년 1월 북경의 감옥에서 세상을 떠나기 전까지 그는 무려 열일곱 번이나 옥살이를 했다. 육사(陸史)라는 그의 호는 그가 스물네 살 되던 해인 1927년 처음으로 감옥에 갇혔을 때의 그이 죄수번호가 264번이어서 그것을 소리 나는 대로 적은 것에서 비롯된 것이라 전해지고 있다.
육사는 투쟁론의 입장에 선 독립운동가이며 또한 일제 강점기의 대표적 저항시인이다. 1933년 {신조선}에 [황혼]을 발표하며 등단하였으나 작품 수가 많지 않고 문단활동도 별로 하지 않았다. 시대의 질곡(일본의 식민통치)에 대결하는 강인한 정신을 정제된 시형식으로 표현한 점이 그의 시가 지닌 특징이다. 유고시집으로 그의 동생 이원조가 출간한 {육사시집}(1946)이 있다.
---출처_ DAUM카페 ㅁ문확과 지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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