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비 오는 저녁 /문병란 나이 들면 사람 만나기가 차츰 두려워진다. 사양지심과 자존심의 어느 중간쯤 서서 그 사람의 속마음을 기웃거리기가 그다지 쉽지 않다. 아, 웃어야 할 대목과 성내야 할 순간이 어느 때인가. 예순 여덟이 되어서야 눈과 눈썹 사이가 가까워지고 사람과 사람 사이를 넘나들며 그네 타는 일이 그다지 쉽지 않다. 5분간 연설이 끝난 저녁 그림자를 따돌리지 못하는 비극 하늘에는 별이 멀어 보이고 방앗간 앞에서도 나는 그냥 지난다. 이 시간 고독한 산보자는 루소의 남은 꿈을 빌려 비 내리는 오솔길에 길게 서 본다. 찬비 오는 저녁 찬비 맞아 얼어 자고 싶은 밤 찬비 같은 여자가 젖고 있을까. 사랑하는 사람아, 아직도 꽃을 보면 가슴이 뛴다고 귓가에 속삭이지 말라. 오늘밤도 찬비가 등뒤에서 내 쓸..